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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정여운

아내      정여운    열두 자이던 장롱이 여덟 자로 갈걍갈걍해졌다   이사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고  모서리에 찍히고 긁혔다   장마철 물난리에 퉁퉁 불은 그대여  내려앉은 서랍조차 팡파짐하구나   처음 봤을 때는   뺨에 피는 부끄럼처럼 연연했다  그러나 아양스러운 날들은 계속되지 못했다  갈수록 오종종한 몸과 걸걸한 문짝 같은 목소리가  내게 왁실거렸다   몇 번의 곡절에도 꿋꿋하게 버텨온 그대여  마음을 담았던 옷장 한 칸이 부서졌구나   윗목을 그토록 지켜온 몸이 반쪽이다   남들은 버리라지만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해서 버리지 못할 정이 들었다   구석구석 삭아진 아내여    -전문(p. 64-65)   --------------  *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에서/ 2024. 6. ..

에세이 한 편 2024.10.08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정여운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정여운   * 신유박해로 1801년 3월 9일에 장기(포항 ※참고)에 유배 온 다산은 그해 10월 20일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좌절과 절망이 아닌, 투지로 시와 책을 지었다. 유배생활 중에 그는 「기성잡시 27수」,「장기농가 10장」,「고시古詩 27수」 등 60제題 1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 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病惑治」등의 저술도 후대에 남겼다.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집대성하고, 사..

한 줄 노트 2024.10.08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육십사 년 동안 이름이 없던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가서 얻은 이름은  연산댁이었다   첫째를 낳고 상진이 엄마  둘째를 낳고 승표 엄마  셋째를 낳고 광표 엄마  넷째를 낳고 임숙이 엄마  다섯째를 낳고 정표 엄마   팔순 노인이 되자  드디어 요양원에서 찾게 된 이름  오얏 이李, 불을 자慈, 저 이伊,  이자이   영정에 새겨진  화장터 전광판에 올라온  묘비에 새겨진 이름  이자이李滋伊   어머니는 어머니를 버리기 위해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전문-   발문> 한 문장: 시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는 에세이와 시가 번갈아 나온다. 작가는 수필로 문단에 발을 들였으나 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세상이 온통 시로 보였다고 고백한다. 작가가 에세이에서 토로하는 내면..

에세이 한 편 2024.10.08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지난 여름, 장마는 길었다. 녹슨 철 대문이 비바람에 저절로 여닫혔다. 그녀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긴 장마에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다.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바람에 서걱대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는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집이 폐가처럼, 유령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잡초를 옆으로 뉘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섰다.  "엄마,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었다. 여느 날 같으면 문을 열고 "그래, 우리 딸 오나?" 하며 반색할 텐데 조용했다. 매일 화분을 만지고 화단에서 꽃을 키우고 집을 가꾸던 노모는 어디로 갔을까. 폭우에 쓰러진 꽃처럼 몸져누우셨나.  일주일 전,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피똥을 쌌다. 방안은 꽃동산이 펼쳐..

에세이 한 편 202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