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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흠 없는 사과가 있었다 외 1편/ 지관순

태초에 흠 없는 사과가 있었다 외 1편      지관순    한계를 모를 땐 누구나 향기롭지   한번 움켜쥐면 내려놓기 힘든 붉고 아삭한  둥긂이어서  너는   손아귀에 스며들기 좋아하지  다른 속도로 깊어가는 속살에게 애원하기 좋아하지   살금살금  우글거리는 고충을 피해 다니다가  손금 밟히기도 하지   어디서부터 사과입니까  꼭지를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하나둘 모여드는  느린 사과 덧칠한 엎질러진 사과 우유부단한 사과  중얼중얼 범람하는 사과   어떻게 실현됩니까 사과는   누군가 중심을 쪼개려고 와락 달려들지  나는 단단히 쥐고 있지  사과에 사활을 건 사과 사흘 안에 부활을 꿈꾸는 사과   둥긂과 와락 사이에 사과나무가 서 있었지      -전문(p. 60-61)      --------..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이윽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홀 중앙에 그녀가 쏟아졌네. 공중에 뿌린 색종이처럼 그녀가 조각조각 내려앉았네. 몸과 숨과 시간을 차례로 이어가며. 우리는 그녀의 춤에 빠져들었네. 실내가 그녀의 궤적으로 가득 차올랐네. 없음과 있음을 골고루 비추면서. 향기로운 응시가 주변을 물들였네. 번져갔네. 그녀가 팔을 뻗어 공중의 현을 끊었네. 잘려 나간 현이 음악을 뱉었네. 그녀의 몸에서 시간이 번뜩였네. 모든 가락이 술렁거렸네. 망각의 질료들이 끌려 나왔네. 그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네. 뒤섞이는 기억들. 회귀하는 호흡들. 홀 중앙에 그녀가 벗어놓은 춤이 남았네. 우리는 다시 춤에 빠져들었네. 그림자가 아니었냐고. 몸이 없는 춤이 왜 끝나지 않느냐고. 심문하듯이. 불은 꺼지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