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20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혼자 먹는 식탁      최서진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듯  혼자 먹는 저녁   슬그머니 실존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고요 앞에서  나는 홀로 밥을 먹는 고독한 왕   봄 바다처럼 찻물이 끓는데  늙은 손목을 가진 왕은 꾸물거리고  뜨거움이 모자란 차를 마신다   왕은 밥을 먹으며 한 발로 다른 발을 긁는다  국물을 흘렸는데도 닦지 않는다  일방통행로처럼 시간이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믿는 표정이 되어   더 '고독하세요' 왕이 명렬하고 왕이 듣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 외로운 식탁에 앉아  고독한 왕은 책을 읽고 행운이 담긴 편지를 쓴다  가장 느리게 오고 있는 행운의 편지를 기다리며  봄 바다의 반짝임에 대하여  슬그머니 혼자서 중얼거리며     -전문..

휘민_시는 자기 신뢰와 신성의 만남( 대담, 한 토막)/ 지평 : 박형준

地平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네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

대담 2024.08.12

박동억_인간을 향한 기다림(발췌)/ 손바닥의 샘 속에 : 박형준

손바닥의 샘 속에     박형준        손바닥은 그릇이라 여기며  샘가를 거닐다 보니  손바닥에 고이는 하늘,  농사짓지 않아 논바닥에 가득 핀 패랭이꽃   웃지 않던 아버지 웃음 같  손바닥 속 꽃   샘물이 흘러넘쳐  손바닥은 그릇이 되고  "저녁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고이고   몰래 손바닥에 피었다 간 꽃과  그늘과 방향 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의 길과  저쪽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는,  겨울에 이불 함께 덮어쓰고 불 끄고 텔레비번 보던,  옆집 아이, 서울 가서 하이힐 또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고   신작로에 날리는 먼지,  여자에의 웃음소리 미숫가루처럼 풀풀 날리고,   손바닥의 샘 속  손금처럼 샘 솟는 패랭이의 뿌리   초여름 들판에  샘물이 있고  지금은 없는  샘 속의..

박순원_우리시 다시 읽기(전문)/ 오랑캐꽃 : 이용악

오 랑 캐 꽃  이용악(1914~1971, 57세)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흠에 살았다는 우리 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 으니 어찌보면 너의 뒤ㅅ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 랑캐의 뒤ㅅ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안악도 우두머리도 돌볼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 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처 드러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혀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니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방울 받지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몰으는 오랑캐꽃두 팔로 해ㅅ빛을 막아줄께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은 1939년 9월 『인문평론』에 발표되었으며, 1947년 발행된 ..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의 살을 먹는······/ 이장욱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의 살을 먹는······      이장욱    ······그런 환상 속에서   나는 거북의 살을 먹는 들개였다가 들개의 살을 먹는 호랑이였다가······   개미가 되었지.  개미가 되니 좋았지.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결국  호랑이를 잡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당신의 살과 내 살 사이의 거리는  당신의 죽음과 내 죽음 사이의 거리와 같아서  우리는 거의  한 몸이었다.   나에게 추도사를 해주세요.  들개가 거북의 추도사를 하듯이  호랑이가 들개의 추도사를 하듯이   우리는 사무실을 나와 다운타운을 걸어갔다.  개미 군락처럼  긴 생이 펼쳐져 있었다.    -전문 (시집『음악집』 2024. 문학과지성사)    * ..

김지윤_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선···(발췌)/ 초전의식*의 자서전 : 성기완

초전의식*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the transconductive consciousness     성기완    1. 서시     - 20240308금 몽홀   동작들이 느려지며 물 흐르듯  이어진  움직이고 있는 내가 편안히 들뜨면서  가라앉음  이렇게 백지 상태가 되면 안되는데 싶으면서 기분좋게  멍해짐  수면과 의식의 중간이랄 순 없고 의식이 있고  몸이 뇌의 명령을 잘 따르고 있는 상태에서의  잠들 무렵 호수가의  뇌파임  내가 시키는 대로 몸이 활발한데  나른함  이게 그 상태구나 하는 자각  느린 평온의 발열  몽홀의 시간 초입  안에 더 있고 싶은 행복감   지출결의서를 가져와  시로 채웁시다  드문드문   안타까운  집에 와서도 계속되는  짧은 이 지나감의 좋음 ..

무명시인/ 함명춘

무명시인     함명춘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려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유난히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한 장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김춘식_가볍고 가벼워서 세상의 그 누구도···(발췌)/ 나무늘보 : 함명춘

나무늘보      함명춘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을 짊어지고 가기에  저토록 느리게 기어오르는 걸까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으니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그건 고뇌일 거다  그래, 지상의 고뇌란 고뇌는 모두 끌어모아  등 위에 짊어지고  나무 꼭대기에 올려 놓으려는 거다  다시는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예 큰 구름 위에  붙들어 매어 두기 위해 기어오르는 거다     -전문-   ▶가볍고 가벼워서 세상의 그 누구도 읽을 수 있는(발췌)_김춘식/ 문학평론가   '나무늘보'의 형상에서 시인의 자기 초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개인적 견해는 아닐 것이다. '고뇌'를 끌어모아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 나무늘보의 느린 행보가 구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전봉래는 '페노발비탈'을 먹고 죽어 가는 시간 속에서, "유서를 쓰기 전에 전축으로 가서 바하의 레코드판을 걸었2)"다. 그것을 두고 그의 아우는   바하의 음악은 치열한 인간적 삶의 갈구요 그 숭고한 승화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취한 이러한 작업에서도 나는 그의 죽음이 패배나 도피의 길이 아니요 오히려 그가 신념한 바와 같이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한 길, 즉 적극적 인간적 삶의 준열한 길임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이것이 전봉건과 김종삼의 시적 출발을 이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출발을 위해 디뎠던 판의 위치는 달랐다. 전봉건은 죽음의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두었다면 김종삼은 '음악'에 발을..

한 줄 노트 2024.08.09

추모-시)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

추모>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1936-2024, 88세)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덕에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했다 고마워하면서.   이제 와서 내다버린 그 신발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  신발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신발들에 실려 다니기 이전보다  지금 나는 세상이 온통 더 아득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폐기물 처리장을 찾아가 어정거리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