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검지 정숙자 2024. 8. 9. 14:51

<한 줄 노트>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전봉래는 '페노발비탈'을 먹고 죽어 가는 시간 속에서, "유서를 쓰기 전에 전축으로 가서 바하의 레코드판을 걸었2)"다. 그것을 두고 그의 아우는

 

  바하의 음악은 치열한 인간적 삶의 갈구요 그 숭고한 승화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취한 이러한 작업에서도 나는 그의 죽음이 패배나 도피의 길이 아니요 오히려 그가 신념한 바와 같이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한 길, 즉 적극적 인간적 삶의 준열한 길임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이것이 전봉건과 김종삼의 시적 출발을 이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출발을 위해 디뎠던 판의 위치는 달랐다. 전봉건은 죽음의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두었다면 김종삼은 '음악'에 발을 두었다. 

  이 차이에 의해서 김종삼은 죽음 그 자체를 살아내는 전봉건적인 방식과 달리 다른 물상을 선생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 물상은 바로 음악이었으며, 그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3) 동시에 시적 실천의 묘상으로 삼았다. 이는 그가 문학적 소외와 정치적 재앙을 연동시킨 것과 같이 그대로 상응한다. 그에게는 삶과 문학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보다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꿈꾼 진정한 세계를 현실 세계를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특별한 미학을 고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 108~109)

 

   2) 전봉건, 『어느 시인의 몰락』, 서정주 외, 『아직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 - 시인들의 테에마 에세이』, 청조사, 중판, 1984[1981], p.105.

   3) 권명옥 엮음 '전집'의 「김종삼 연보」에 의하면, 그는 "1947년 2월, 극단 '극예술협회'에 입회하여 연출부에서 음악효과를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1955년 12월 방부 정훈국 방송과에 상임연출자(음악담당)로 일"한 데 이어 "1967년 4월, 일반사원으로 동아방송 제작부에서 연출을 담당"하였고, "1976년 5월, 방송국 정년퇴임"할 때까지 음악 프로듀서로 봉직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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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6월(414)호 <기획연재 60/ 정과리의 시의 숲속으로> 에서  

  * 정과리/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문학, 존재의 변증법』(1985), 『스밈과 짜임』(1988), 『글숨의 광합성』(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