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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섭_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발췌)/ 어느 날/ 권현수

어느 날      권현수    내가 버린 하루를  공차기하는 너   지나가는 바람결에  마른 대이파리 흩날린다   5월인데    -전문-   ▶공空과 색色의 동일성 증명/ 선어禪語의 절제와 응축(발췌)_심은섭/ 시인 · 문학평론가  시는 문학적인 형식으로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형식이나 내용을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어詩語의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함축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도 일반적인 시론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의 형식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특별한 경우이지만 형식이든 내용이든 함축이나 압축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권현수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

병(病) 속의 편지 외 1편/ 김건영

병病 속의 편지 외 1편     김건영    누군가 신호를 적어 놓았다 문제가 있습니다 몸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기호를 받아들이면서 이별이 늘어나요 늘어납니다 잊어버린 것들이  아픈 사람이 가득하다 복도는 하얗다 꺼지지 않는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은 잃어버릴 예정입니다 더 이상 골목에 불이 꺼진 창문을 세지 않는다 잠든 사람들과 빈집이 구분되지 않는다 병원病原이라 부를까    병상에서 쉬는 것은 몸속의 병이겠지 편안한 병 아픈 사람들은 속이 빈 것처럼 바람 소리를 낸다 병은 투명하고 단단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입을 꾹 닫고 있다 기호는 스스로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을 알게 되면 나아지는 것이 있습니까 농담은 자주 미끄러진다 병 속의 편지를 아시나요 ..

감나빗/ 김건영

감나빗      김건영    처음으로 창밖에서 떨던 겨울나무를 알아차린 게 몇 살때였더라  아직도 그것들이 매일 밤 떨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낫던 때가 있었는데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눈을 감아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고   아름다워지려면 모르는 게 좋더라  지식이 밥 먹여 주나  고지식하단 말이나 듣지  너무 깊이 알면 착해질 수도 없어  알면 알수록 무서운 것들이 늘어나  눈을 감으면 좋은 점이 많아   이제 그림자도 정말 무섭다는 걸 알아  이제 눈을 감아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왜 나를 때려요  그러게 왜 가만히 있었어요   창밖에서 떨고 있는 겨울나무처럼  가만히 흔들렸겠지  눈을 감는 아이들이 있겠지   이제 눈을 감고  ..

호곡장/ 휘민

호곡장      휘민    아이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건  짐승 같은 울음소리뿐   십 분이 넘도록 그치지 않는다   슬리퍼를 끌고 급하게 차를 몰아가지만  나를 번번이 멈추게 하는 붉은빛의 질문들   언니가 울고 있다  집을 등진 채 길 위에서   봄과 함께 사라진 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주변의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다   어떤 저녁의 울음은  매미 소리보다 뜨겁다     -전문(p. 39)     --------------  * 『문학 철학 사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휘민/ 2001년 ⟪경향신문⟫ 시 & 2011년 ⟪한국일보⟫ 동화로 등단, 시집『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중력을 달래는 사람』, 동시집『기린을 만났..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아버지의 주소      이종성    모든 것들은  주소지로 간다   북태평양까지 거슬러 올랐다가도  회귀하는 연어들  모천의 주소를 갖고 있다   젊었을 적  필름이 끊어지시고도  용케도 집으로 돌아와 눕던  울 아버지   아흔 넘어 주소를 잃어버리고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아버지  주소 찾아 헤매신다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겨우 어머니 알아보시고,  '어디 갔었어?'   놓칠세라 주소 붙잡고 졸졸  따라오시는 아버지     -전문(p. 20-21)    * 블로그 註: 일본어 번역본은 책에서 일독 要    --------------  *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여름(77)호 에서  * 이종성/ 199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산의 마음』, 산문집『서대문, 사람의 길을 잇..

울창한 사과/ 김미정

울창한 사과      김미정    누군가 위태롭게 햇살을 익히고 있다   사과를 먹는 일은  사라진 방향을 오래 바라보는 일   붉은 울음이 씹힌다   휘어진 사과의 밤을 만져바요 그날 쏟아지던 빗방울의 고백을 잊지 마세요 멀리 날아간 사과 너머의 열병을, 그리고 잎사귀마다 빛나던 그 번개 같은 순간을   사과는 상처가 모여 완성되는 맛인가  너무 시거나 씁쓸해지는 사과들   맛볼 수 없는 사과가 늘어난다  뭉쳐도 자꾸만 흩어지는 날들   풋사과는 풋사과로 늙어가요 덜 익은 표정이 가지마다 만발하죠 바람은 모서리를 베어먹으며 자라고 다음은 언제나 다음이에요 뒤돌아서는 초록을 부를 수 없어요   나의 사과는  날마다 어두워지고 깊어지고  사과는 사과에 갇히고 피를 흘리고   우린 주먹을 쥐고 겹겹이 아파한..

선풍기/ 박소윤

선풍기      박소윤    선풍기는  아주 빠르게 돌아요   내가 선풍기면  힘들 거 같아요   내가 하루 종일 돈다면  너무 어지러울 거예요   선풍기는 계속 도는데  얼굴이 빨간색이 안 돼서  신기해요   우리는 더운 바람 주는데   선풍기는 우리한테  시원한 바람을 주어서 고마워요     -전문(p. 75)     --------------   * 『문학매거진 시마 SIMA』 2023-가을(17)호 >에서   * 박소윤/ 인천가현초등학교 3학년

동시 2024.08.16

수평기 외 1편/ 길상호

수평기 외 1편      길상호    수평선이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물방울처럼 누워 계시고  바다는 늘 중심이 맞지 않았다   무거운 노래만이 그 방에 가득 찼다  벽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액자 속의 사진이 삐딱,  바로 세우려 하면 할수록 더 옆으로 누웠다   한파에 몰린 아침이 도망쳐 왔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 마당을 채웠다   수평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공기 방울이 찬 건 아닌지  자주 머리가 아팠다   눈을 이고서  담장이 한쪽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골똘히 강구책을 생각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문(p. 54-55)       ---------------------    고양이 구름    책을 펼쳐 놓고 눈이 가지 않는다   등에 줄무늬가 또렷했던 구름  맥없이 풀려 ..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거울을 보면 그 얼굴이 그대로 있어요, 할 수 없이 먹어 치워요, 혈당을 조절해야 한다는데, 과식하면 안 되는데,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 입에서 김이 날 일도 없고 발버둥도 사그라졌죠, 구름이 천장을 뛰어가네요, 까만 눈을 갖고 있겠죠? 달이 헉헉 숨차고, 마우스는 바퀴를 굴리고, 컴퓨터가 한 장 한 장 백지를 넘기는 밤이에요, 당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뒀어요, 삭은 밤이 고무줄처럼 끊어지기도 해요, 술은 아직 마시고 있지 않아요, 미안해요, 어두운 이야기만 해서    -전문-   해설> 한 문장: ㄱ가 "먹어 치"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말한다.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

비보호/ 권승섭

비보호     권승섭    약속을 지키러 간다 주말 오후 두 시 광장  만나면 약속은 쉽게 사라지고   멍하니 서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연인을 만난 연인이 빠져나가고  공원의 인원이 두 명 줄어들고   시계탑을 바라볼수록 초조해지는 얼굴도 있었다   멀리서 차 키를 쥔 손을 흔들며 그가 온다   많이 기다렸어?   얼마만큼 우두커니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시계탑을 다시 보아도 알 수가 없고   차 키를 쥔 그와 차가 있는 곳으로 간다  시침과 분침이 겹쳐지는 순간으로 나아가듯   차 앞에서 그가 조수석 문을 연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거야   사방과 팔방으로 늘어진 곳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백운호수 팻말을 지나 우리는 백운호수로 향한다   호수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