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의 샘 속에
박형준
손바닥은 그릇이라 여기며
샘가를 거닐다 보니
손바닥에 고이는 하늘,
농사짓지 않아 논바닥에 가득 핀 패랭이꽃
웃지 않던 아버지 웃음 같
손바닥 속 꽃
샘물이 흘러넘쳐
손바닥은 그릇이 되고
"저녁 밥 먹어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고이고
몰래 손바닥에 피었다 간 꽃과
그늘과 방향 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의 길과
저쪽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는,
겨울에 이불 함께 덮어쓰고 불 끄고 텔레비번 보던,
옆집 아이, 서울 가서 하이힐 또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고
신작로에 날리는 먼지,
여자에의 웃음소리 미숫가루처럼 풀풀 날리고,
손바닥의 샘 속
손금처럼 샘 솟는 패랭이의 뿌리
초여름 들판에
샘물이 있고
지금은 없는
샘 속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있고,
저기 어디쯤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애가 패랭이꽃 분홍빛으로 아려오고
나는 손금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며
집을 행해 걸어간다
-전문-
▶인간을 향한 기다림/ 박형준 시인의 시 세계(발췌)_박동억/ 문학평론가
인간의 터전은 가족이다. 이것은 박형준 시인의 자연 서정시를 이루는 가장 깊은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어떻게 손바닥에 하늘을 쥐는가. 넘치는 샘물을 얻는가. 부모를 떠올릴 때 그러하다고 시인은 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람의 손은 가득하다. '나'는 "청춘의 길"을 헤매고 상경하여 "신작로"를 거닐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샘 속의 불러보고 싶은 이름"과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손금'과 '하늘'과 '집'의 방향은 나란히 놓인다. 그것이 모두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근원적인 거처이기 때문이다.
(···)
박형준 시인의 시에서 세상을 감각하는 위치는 피부다. 따라서 샘물의 부드러움은, 더욱이 그 샘물을 받아든 매개가 '손'이라는 사실은 '스미는' 물의 자세로 세상과 관계하고자 하는 윤리적 지향을 암시한다. 그의 시에서 반복하는 '부드러움'의 표상은 세상의 냉담을 냉담으로 놓아두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p. 시 79-80/ 론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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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신작소시집/ 신작시/ 작품론>에서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는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불탄 집』『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 박동억/서울 출생,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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