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書籍
기형도(1960-1989, 29세)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가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전문(p. 274-275)
♣ 대자보로 벽에 붙여둔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을 보며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었다. 한때 나도 기적을 믿지 않는 내 삶을 곱씹으며 흐느낀 적이 있었다. 대자보 앞에서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생각했다. 시는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가만히 서서 나를 들여다보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위로도 건넬 수 없는 그 순간에서 이 시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김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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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징학연구소』 2024-가을(15)호 <다시 읽고 싶은 시>에서
* 기형도/ 경기 옹진 출생,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89년 유고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 김진규/ 경기 안산 출생, 201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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