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뼈 물혹 같은 외 1편
문정영
다시 눈꺼풀 떨리는가를 정오에 물었다
초여름 소풍 후 붉은 샘이 생겨났다
나비가 여러 번 앉았다 날아간 흔적이 물방울로 고였다
귀가 열리고 코끝이 새겨진 도화꽃 옆에서 말했다
네가 나의 처음이야, 내 몸은 투우사의 붉은 천이야
물이 빠져나간 뒤 다시 차오르기가 이른 봄 같았다
너를 얻기 위해 나무 한 그루에 그늘이 차도록 물을 주었던가
한쪽은 가물고 한쪽은 물 폭탄인 南美처럼
꽃 그림 한 장 피어나는 순간 우리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 장렬한 화촉을 위하여
지금 몸살 앓고 있는 것들, 패티쉬한 것들
하늘을 끌어와 덮고 싶은 사람들, 그 곁에서
우리는 서로의 복숭아뼈 물혹을 씁쓸한 시간으로 만졌다
-전문(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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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프레임의 법칙
그 순간을 늙은 나무처럼 기다렸다
배반을 일찍 알아버린 붉은 잎들이 우듬지에서 떨어졌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불편한 나이
우정과 사랑은 평생의 질문이었다
사랑이 끝났을 때 어떤 의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 질문마저 잊어버릴 시간
쌍둥이 같은 친구와 다른 별에 있는 두 사람의 불행한 연인
자책의 끝은 없었다
늙은 나무는 마지막 잎을 떨궈도 종말이 두렵지 않았다
다 비운 울음의 바닥 들여다본 적 있는가
어떤 열정의 굴레에도 갇히지 않는 몸짓 있을까
-전문(p. 72-73)
◈ 감상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불편한 나이/ 우정과 사랑은 평생의 질문이었다“(「열정」). 이 구절은 문정영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술의 둠스데이』를, 아니 시인의 생애와 전 인류의 삶을 관류한다. 시집 전체에 면면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섬세한 문장들이 등고선을 높여가며 독자의 이성을 감성체계로 나아가게 한다. ”너를 얻기 위해 나무 한 그루에 그늘이 차도록 물을 주었던가“(「복숭아뼈 물혹 같은」), 예서 어떤 필력을 더 요구하겠는가. 정숙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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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술의 둠스데이』에서/ 2024. 8. 30. <달을쏘다> 펴냄
* 문정영/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그만큼』 『꽃들의 이별법』『두 번째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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