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검지 정숙자 2024. 8. 16. 00:49

 

    모처럼의 통화는

 

     길상호

 

 

  거울을 보면 그 얼굴이 그대로 있어요, 할 수 없이 먹어 치워요, 혈당을 조절해야 한다는데, 과식하면 안 되는데,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 입에서 김이 날 일도 없고 발버둥도 사그라졌죠, 구름이 천장을 뛰어가네요, 까만 눈을 갖고 있겠죠? 달이 헉헉 숨차고, 마우스는 바퀴를 굴리고, 컴퓨터가 한 장 한 장 백지를 넘기는 밤이에요, 당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뒀어요, 삭은 밤이 고무줄처럼 끊어지기도 해요, 술은 아직 마시고 있지 않아요, 미안해요, 어두운 이야기만 해서

    -전문-

 

  해설> 한 문장: ㄱ가 "먹어 치"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말한다.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이거 좋은 거예요」). 이어 그가 쓴다. "그러니 우리는 그만 제 얼굴을 찾는 게 좋겠어" (「그만해도 돼」). 이것은 자문자답인가. 여기까지 쓰고 "질문이 많아 미안해요,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세요" (「반쯤 있는 그」, 미발표 시), 라고 그가 혼잣말을 할 때 나 또한 그를 따라 속삭이듯 외친다. 제발 '헛소리라도 좋으니 K, 당신이 당신의 얼굴을 먹지 말고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p. 시 36/ 론 117) <이정현/ 문학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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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에서/ 2024. 7. 22. <시인의일요일> 펴냄

* 길상호/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등, 산문집『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등, 김종삼문학상 · 천상병시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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