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검지 정숙자 2024. 8. 31. 14:30

 

    살아남기 위한 밥 앞에서 외 1편

 

     손한옥

 

 

  햇빛도 사라지고 구름도 없는 날

  230밀리 보살의 발자국

  지나간 자리 위

  거대한 보리수 뿌리째 흔들리더니

  오늘 그 열매 선정에 들었다

 

  살기 위해 받은 한 술의 밥 앞에서

  수많은 선지식들 지나간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읍한다

  뿌린 선근 없는데 돌아오는 귀인들의 손에 들린

  셀 수 없는 보리수 알알이

  귀를 열고 땀땀이 꿰맨 오십 개 바늘 자국 흔적

  통증이 맑다

  면봉마다 묻힌 신약 약사여래의 손 멈추고

  폭풍 지난 자리

 

  이윽고 고요한 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소리 가려듣지 말라 한다

  큰 소리 작은 소리 각지고 모난 소리

  항하사 모래 수만큼 밀려와도

  그 귓속 깊고 깊은 샘에서

  찬탄의 빛 신묘한 빛

  사리로 품으라 한다

    -전문(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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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사랑꾼 등극

 

 

  11박 12일 병실에서의 마지막 밤

  밖에는 흰 눈이 무섭게 내려도

  날만 밝으면 나는야 집으로 간다

  선선히 커가는 강생이들 목소리

  박달산에 불어 내려오는 솔바람 소리

  고기 사고 두부 사고 오르내리면

  산유화 피던 뜰과 삼존불의 품으로

 

  막음대 사이로 내 손을 잡고

  간이 침상에서 쪽잠 든 모습 바라본다

  카리스마 제왕의 모습 사라지고

  연분홍 치마 입은 열일곱 살 내 손을 잡았던 소년 있다

  철봉대 잡고 하늘을 빙빙 돌던 그 허리 다리 지금

  얇은 새우처럼 웅크린 채 근심 품고 잠들어 있다

 

  어디쯤 가서 고요할까

  오십 바늘 기워진 통증의 끝은

  앉아도 누워도 멈추지 않는 이 비명의 끝은

 

  긴긴밤 네 개의 수액을 달고

  내가 일어날 때마다 수십 번

  말없이 일어나 내밀던 등

  내 일생을 운행하던 등

 

  조선의 사랑꾼 등극,

  (며늘아기가 아버님께 바친 면류관)

 

  그 극에 이르자면 생명을 담보로 하는가

  블랙홀 따라 든 악성의 겨울

  기적으로 지나가고 유록의 봄 오면

  나 이제 맹목으로 지극하고

  그대 맹목의 군림을 경배로 허용하겠다

      -전문(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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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사랑이 깊어 내가 아프다』에서/ 2024. 7. 30. <문학과사람> 펴냄

  * 손한옥2002년『미네르바』로 시 부문 & 2016년『한국미소문학』으로 동시 부문 등단, 시집『목화꽃 위에 지던 꽃』『직설적 아주 직설적인』『13월 바람』『그렇다고 어머니를 소파에 앉혀 놓을 수는 없잖아요』『얼음강을 건너온 미나리체』, 동시집

『햇빛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