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5 6

그늘의 사랑/ 정일근

그늘의 사랑 정일근 커피벨트 고산지역의 아라비카 커피 열매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림자 나무 아래서 명품의 맛이 든다 이 나라 깊은 산 어느 그늘에 자란 산삼이 최고의 명약이 된다 맹독 가진 뱀이 그늘에서는 유순해져 사람을 피해 간다 보아라, 꽃은 그늘에서 향기를 만들고 볕 아래서 시든다 시인이여, 너 또한 꽃 지는 그늘에서 시를 만나지 않았는가 우리 입맞춤이 그늘에서 가장 뜨거웠던 법이니 정수리가 서늘해지는 그늘의 사랑이 있고 그 그늘에서 열매가 달게 익는다 너는 뼈 익고 살타는 햇볕 속을 걸어가면서 적의 없이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볕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볕이 주는 선물이니 절하며 감사하며 받아라 -전문(p. 162)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바람이 조용하고 맑은 햇빛을 동그란 탁자 위에 놓고 갑니다. 저는 이 꽃다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당신께 갑니다. 당신의 초대에 늦을까 봐 서둘러 눈을 감고 지름길로 ᄀᆞᆸ니다. 당신은 사원이나 궁중에 아니 계시고 무한한 대기 중에, 공기 중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장소는 언제나 제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골ᄍᆞ기임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1990. 9. 20.) 방금 samsung man이 다녀갔습니다. 냉장고 야채박스 밑에 자꾸만 얼음이 깔리기 때문이었어요. 거뜬히 A/S를 마친 뒤 그는 뭐 더 불편한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기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20년은 족히 넘었을 소형 분쇄기를 꺼냈습니다. 바쁠 텐데도 그는 분쇄기를 해체/조립했습니다...

미신/ 신용목

미신 신용목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유령 역할을 맡은 배우는 자신의 육체를 없애야 했지. 멕베스를 연기하는 자가 멕베스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유령을 연기하는 자는 죽어야 했다.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무대의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에 그는 관객들의 생각 속에 무대를 차리고 대사를 쳤다 생각 속에서 연기를 했다. 지문으로 가득 찬 세계가 생각 속에 펼쳐지고 생각이 무대가 된 관객들은 아무도 극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 속에서 울고 생각 속에서 웃고 생각 속에서 소스라치느라 낮과 밤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의 삶이 모두 연극인 줄 몰랐다. 유령이 그들의 생각인 줄 몰랐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잊었다. 하나의 이야기에 가려져 다른 이야기가 ..

정초 생각/ 곽진구

정초 생각 곽진구 누가 봐도 잘 될 리 없는 상황이지만 모든 게 잘 될 거라며 당신이 왔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귀를 둥글게 말은 쥐토끼처럼 귀를 둥글게 말은 당신은 정월 초하루 내 집 마당에 발을 내려놓으며 선몽善夢을 복조리에 담아 방문 앞에 걸어 놓는다 선단仙丹을 주는 것이리라, 적어도 나에겐 그래서 나는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울 것이다 아마도 하늘을 날아봐, 날아봐,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허무맹랑한 날개가 만져질 것이다 허망하게 들릴지 몰라도 하늘로 뛰어올라 별들 사이를 무장무장 유영할 것이다 당분간 지구론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곳에서 소리소문 없이 살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당신이 계신 별로 사라질 것이다, 것이다 문득 큰절 올리는 조상님 앞에서 별안간 -전문..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걸을 때마다 물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내 귀에는 물이 흘러요 아, 나는 물방울이에요 따로 움직이는 몸짓은 눈에 잘 띄어서 그날 밤 짧은 다리로 뒤척이는 걸 알았어요 다르다는 이유로 일생이 흔들렸던 사람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물처럼 걷는 연습을 하고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고 있죠 건널목 앞에서 절룩이던 시간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오늘, 말없이 가다 마주친 사거리에서 듣지 못한 말들이 아는 척을 해요 다리가 길어지면 긴 꿈을 꿀 수 있을 텐데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싶은 하루가 튀어나와 붙잡아 준다면 가능할까요 씩씩하게 내딛는 걸음에 내일은 물이 넘치는 소리로 가득할 거예요 늘 궁금했어요 나는 왜 지구보다 늦게 가고 있는 걸까요 -전문- (p. 111) 시작 ..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명덕상회 짐자전거는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전거였다 석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연탄이나 쌀자루를 싣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그란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자랐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온 동네 아낙들의 왁자한 웃음이 몰려가 천장에 매달린 삼십 촉 백열들이 상점을 지키는 밤이면 아버지는 방바닥에 사탕을 늘어놓고 어린 딸에게 산수를 가르쳤다 가끔은 물감 향 번지는 스케치북 속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힘센 짐자전거가 때론 울기도 한다는 비밀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한번 녹이 나기 시작한 체인은 자꾸만 궤도를 거부하고 바람의 소리로 일구어낸 집 문패 밑에서 빠르게 부식되어 갔다 사시사철 땀을 굴리는 아버지는 연등 같은 꽃상여에 눕고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고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