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 113

방아쇠증후군/ 강기옥

방아쇠증후군      강기옥    "아야야 아야"   과녁도 없이 겨냥하는  아내의 총구에는 총알이 없다   좁쌀과녁이라도 되어야 할 상황에  나는 철없이 화약만 장전했다   식탁에 윤기를 더하려는  칼질과 가위질   난도질당하는 건  도마가 아닌 엄지손가락이었다   방아쇠를 움켜쥔 뼈마디에  열불만 질러대는 철없는 밥상   사단장 군단장을 능가하는  된장 간장 고추장을 거느린 명장   서툰 총잡이가 당기는 방아쇠에  내 뼈마디가 미리 아프다     -전문(p. 58-59)   --------------------  * 『월간문학』 2024-3월(661)호 > 에서  * 강기옥/ 1995년 『문학공간』으로 등단, 시집『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그대가 있어 행복했네』『오늘 같은 날에는』등

액체 시대*/ 강서일

액체 시대*      강서일    잉여의 손  잉여의 불빛   잡을 인형이 많아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처럼  볼 것이 너무 많아 한 편도  보지 못하고 밤을 넘긴다   수많은 선택지와  수없이 구멍 난 파지가 쌓여 가는  나날들이라니   놀라지 마시라  지금은 천년 빙하가 녹아내리고  명사는 동사가 되어 흘러내리는,   벽에 걸린 거울은 산산조각  파편이 되는 시간,   늙는다는 것은 과연  살아남는다는 것인가   신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희망을 멈출 때뿐**    그러니 놀라지 마시라  미라는 미라일 뿐,   시간의 밀원지 따라 돌다리도 흘러가고   무너질 것은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니   지붕을 덮치는 액체 시대여     -전문(p. 52-53)    *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

큰기러기 필법(筆法) 외 1편/ 윤금초

큰기러기 필법筆法 외 1편      윤금초/ 시조시인    발묵 스릇 번져나는 해질 무렵 평사낙안  시계 밖을 가로지른 큰기러기 어린진이  빈 강에 제 몸피만큼 갈필 긋고 날아간다.   허공은 아무래도 쥐수염 붓 관념 산수다.  색 바랜 햇무리는 선염법을 기다리고  어머나! 뉘 오목가슴 마냥 젖네, 농담으로.   곡필 아닌 직필로나 허허벌판 헤매 돌다  홀연 머문 자리에도 깃털 뽑아 먹물 적시고*  서늘한 붓끝 세운다, 죽지 펼친 저 골법骨法.     -전문(p. 36)    * 큰기러기는 공중을 날 때 人자 모양 어린진을 친다. 대오 가운데 맨 우두머리가 항상 앞장서서 리더 역할을 한다. 큰기러기는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도 깃털을 뽑아 떨어뜨려두는 습성이 있다. 이른바 '유묵遺墨'처럼 제 다녀간 흔적을..

이은지_ 미음과 리을 사이를 헤매며(발췌)/ 무성 : 구현우

무성     구현우    신은 좋은 마음과 좋은 몸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나는,  좋은 마음이 깃든 좋은 몸을 원했습니다.    신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마음을 담은 좋은 몸은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네 번의 전생이 그러했습니다.   신은 그러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은 얼굴입니다.  신에게도 표정이 있고  마음이 있다면요.   타인이 빌었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나와 가까운 타인 말입니다.   신은 그가 좋은 몸을 바랐고 일평생 병에 걸리지 않았으나  수시로  자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몸의 문제입니까, 마음의 문제입니까?   신은 몸도 마음도 아닌 그의 문제라고 합니다.   신은,  나쁘지 않은 마음은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괜찮습..

거기 외 1편/ 동길산

거기 외 1편      동길산    나무에서 멀어진 잎은 어디에 닿나  새에서 멀어진 소리는 어디에 닿나  보이는 데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데도 아닌 거기  젖었다가 마른 손의 물기는 어디로 가나  젖었다가 마른 마음의 물기는 어디로 가나  아예 모르지는 않지만  안다고도 할 수 없는 거기  가 본 곳과 가 보지 않은 곳은 늘 많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늘 많아도  누군들 가 본 곳만 갔으랴  누군들 보이는 것만 봤으랴  바람 세차게 불다가 누그러진 둑길  둑 너머로 밀려간 바람은 어디에 닿나  어디에 닿아서  마음의 젖은 물기를 말리나  둑 너머로 밀려간 물은 어디에 닿나  어디에 닿아서  젖었다가 마른 마음을 다시 적시나      -전문(p. 28)      ----------------..

삼한사온/ 동길산

삼한사온      동길산    사흘은 춥고 나흘은 따뜻한  삼한사온  삼한의 끝날이 며칠째 이어지고  오늘 또 이어진다  외투의 단추를 있는 대로 채우고  미끄러질지도 모를 영하의 바깥 나선다  삼한사온이란 말이 처음 나오던 그 옛날에도  별반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추운 날이 길기도 했으련만  안 좋은 날보다 좋은 날을 하루 더 늘린  사람의 삼한사온  추운 날이 아무리 길더라도  삼한의 끝날은 기어이 오고  추운 날보다 하루는 더 긴  한겨울 삼한사온      -전문-    시인의 산문> 한 문장: 집 안팎이 훤한 건 달빛 덕분이다. 오늘은 보름 무렵. 정확하게 헤아리진 않았지만 며칠 전이 음력 열흘이었으니 보름이거나 하루 앞뒤다. 보름이나 하루 앞뒤는 달이 가장 둥글어지려고 하거나 가장 둥글거나 가..

시의 집/ 김월숙

시의 집     김월숙    숲을 찾아갑니다  학이 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느긋하신 노송 곁을 지나  구불구불 골짜기를 건너고  거친 숨 몰아가며 고개를 넘지만  학은 보이지가 않아요   북극성을 찾지 못하고  지도가 구겨지는 동안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비가 내립니다   참나무 사이에 정좌한 돌무덤을 지나고  너덜겅을 장악한 가시덩굴 휘돌아  빗물을 따라 흐르기로 합니다   두 날개로 작은 집을 감싼 학이 보입니다  정작 숲을 울리며 우는 건  젊은 시인이네요   스무 해 전에 헤어진 벗도  삶의 수련장을 펼치고  핵심 문제를 풀던 소년도 함께 울어요   잎 다 떨군 나무 기둥 사이로  강물처럼 출렁이는 어깨들이  천 년째 집을 짓고 있어요  눈물로 짓는 집이에요      -전문(p. 8..

두 번째 남자/ 한선자

두 번째 남자      한선자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선다  머리에는 제멋대로 자란 조팝꽃이 수북하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다   바다 한가운데 떨어졌다고  갑자기 수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지느러미를 키워 보고 있다고   드론을 수천 번 띄운다고  갑자기 하늘을 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날개를 달아 보기로 한다고   그러나, 삼십 몇 년 굳은 몸에 새싹이 돋는다는 것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뒤돌아보면, 굳은 몸에 새겨진 물결과 발자국들  어디 쉽게 버리겠는가   말쑥하게 차린 한 남자가 사무실 출구로 나가고  새로 태어난 두 번째 남자가 카페 입구로 들어선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4-2월(660)호 > ..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혼자일수록 술 담배 끊고  이마를 차게 하자고  지난겨울 구들장을 지었다  때론 일주일 넘게 누구와 말을 한 기억이 없어  말의 씨가 말랐는가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따옥따옥 따오기를 부르다 보면,  올겨울도 별일 없냐고  옻닭 국물처럼 구수한 목소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고장 난 기억회로 같았다   두어 차례 송이눈을 받아먹으며  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2023년 1월 9일, 같은 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파면당한 동료들은 어찌 지낼까  학교 주소를 삐뚤빼뚤 적으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며  말의 씨가 말랐을까  잠을 청하는 게 두려웠을까  고장 난 기억회로를 못 벗고  춘분을 맞고 말았는데   복직 소식은 없어도  제비꽃은 보자고 시냇가에 나오..

버스/ 이병초

버스     이병초    본관동 앞 농성 천막 곁으로  마을 버스가 삼십 분 간격으로 들어왔다가  학생들을 태우고 떠났다  나는 엔진 소리만 듣고도 시간을 짐작한다는 듯  천막 기둥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그러다 빵빵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면   "동료들 해고시키겠다는 구조조정 안에  과반수 가까운 동료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2017년 2월 13일이었다  문득 중국 단편영화 가 생각났다  내 숨소리를 똘똘 뭉쳐 검처럼  뽑고 깊었던 걸까  밤늦도록 베갯잇이 달빛에 빛났다"라고   2년 전 일기장에 써 놓은 글씨가 천막에 어른거렸다  동료라고 믿었던 그들의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천막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시간대입니다. 이 시차時差는 너무나 커 보입니다.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