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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좌표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더 많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새날의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듯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박민서    모든 저녁은 목초지에서 돌아온다  빈방 가득 빛이 없는 연료들  이불 속에 가득 찬 실뭉치에  따듯한 말이 들어 있긴 할까   양 떼는 웅성거리는 밤에 자라서  등과 불룩한 배는 누구의 몸 치수를 재는지   길게 풀어져 나온 실뭉치들로  엉킨 저녁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서로의 얼굴에서 터진 솔기 같은 표정이 적힌다   바깥과 안쪽 모서리에 상처가 난다  저녁을 다 감기 전에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고  풀밭에 떠도는 말을 양 떼가 몰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  양 떼의 울음으로 실은 풀어지고 초식동물의 잠은 감긴다   입구를 흔들면 저녁이 짧아진 양 떼들이..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그믐달에 줄 매어 공후로 탈까? 화살촉에 꽃 매겨 서편에 쏠까? 마음 없는 마음은 천지도 한 뼘 오르ᄅᆞᆨ내리ᄅᆞᆨ 먼먼 그네를 타네 (1990.10. 4.) 오래전 저 뒤뜰이 서리 낀 하늘이었군요 그 밤은 분명 협곡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란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다만 수직/수평으로 한 올 한 올 ᄍᆞ보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실일지라도 진실/진심을 부어보는 거,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의 삶,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캄캄히 진화 중입니다 -전문(p. 66) ------------- * 『미래시학』 2024-봄(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