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검지 정숙자 2024. 4. 5. 00:59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걸을 때마다 물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내 귀에는 물이 흘러요

  아, 나는 물방울이에요

  따로 움직이는 몸짓은 눈에 잘 띄어서

  그날 밤 짧은 다리로 뒤척이는 걸 알았어요

 

  다르다는 이유로 일생이 흔들렸던 사람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물처럼 걷는 연습을 하고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고 있죠

 

  건널목 앞에서 절룩이던 시간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오늘, 말없이 가다 마주친 사거리에서

  듣지 못한 말들이 아는 척을 해요

  다리가 길어지면 긴 꿈을 꿀 수 있을 텐데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싶은 하루가 튀어나와

  붙잡아 준다면 가능할까요

 

  씩씩하게 내딛는 걸음에

  내일은 물이 넘치는 소리로 가득할 거예요

  늘 궁금했어요

  

  나는 왜 지구보다 늦게 가고 있는 걸까요

    -전문- (p. 111)

 

  시작 노트> 한 문장: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고 나니 내 안에서 뭔가 한 뭉텅이의 이야기가 빠져나간 것 같아 슬럼프가 왔다. 같은 시기에 갑작스레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처음 휴직도 하게 됐다. 그동안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좀 쉬어가란 뜻인가도 싶었다.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쉼표를 찍게 됐다. 몸도 시도 다 지친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20여 년 전 사놓고 제대로 못 본 책들도 다시 보았다. 그렇게 기형도, 장석남, 김기택 시인의 시도 다시 만났다. 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도 생각도 바뀌고 있었구나 싶었다. 시만 그걸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내 시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멈추고 나서야 보이는 순간이 있다는 걸 느꼈다.

  지금이라도 잠시 멈추자는 말을 사무실 책상에 붙여놨다. 바람이 분다는 걸,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는 걸 멈추고 나서야 알게 됐다. 

  다시 詩作이다. (p. 시 111/ 론 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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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 < 『미당문학』이 뽑은 오늘의 시인/ 자선시/ 시작 노트> 에서

  * 홍철기/ 1974년 익산 출생, 2012년《전북도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 2017년『시와표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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