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19

정숙자_제 1산문집『밝은음자리표』/ 서사

서사 나비 이슬 별, 귀뚜라미 소리와 구름과 고요, 사랑과 우정, 편지와 시, 부모형제와 어린아이 눈망울을 우리는 이제 밝은음자리표라 여기자. 얼마나 맑고 따뜻한 햇살인가! 언어들인가! 길- 하늘- 미래로 이어지는 악보에서 희망이 되어주었던(되어주는) 풀꽃들과 물별들,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는 새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착한 사람들의 온정을 우리는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꺼뜨려서는 안 될 밝은음자리표라 이르자. 그리고 이제 조금은 웃자. 한쪽씩 또 한쪽씩 행복을 열자. 2008. 여름/ 검지 정숙자

시와 생활/ 정숙자

시와 생활 정숙자 나에게는 삼십 년 넘어 위안을 주는 공책이 한 권 있다. 열서너 살 때부터 여기저기서 읽고 베낀 시들로 채워진 보고다. 거기 적힌 어느 시 한 편인들 나에게 꿈과 빛이 아니었으리요, 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내 삶이 고단할 때마다 펴보았던 시 한 편을 여기 옮길까 한다. 나는 바다로 가야지, 쓸쓸한 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내 오직 원하는 것, 돛대 높직한 배 한 척과 방향을 가려줄 별 하나, 타륜의 돌아가는 충격,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흰 돛폭, 해면을 뒤덮는 잿빛 안개, 훤히 트여 오는 새벽하늘만 있으면 그만이어라.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지, 흐르는 조수가 부르는 소리; 거역치 못할 난폭한 소리, 분명히 날 부르는 소리를 따라, 내 오직 원하는 것, 흰 구름 날리는 바람 부는 ..

시와 철학/ 정숙자

시와 철학 정숙자 고통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하나의 길이다. 정밀하게 마음 쓰며 넘어설 수밖에 없는 산이다. 누가 뭐래도 고통은 희로애락 중에서 가장 중심이 깊다하겠다. 지혜와 권세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솔로몬도 고통의 자리에 머물러서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다음의 글을 자신 안에서 읽었던 것이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시와 우정/ 정숙자

시와 우정 정숙자 세상은 시종 캄캄한 밤이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천공을 가로지르는 사이 우리는 잠시 어둠을 잊을 뿐이다. 이렇듯 어둠이 전제, 또는 내재된 삶에서 벗이란 얼마나 따뜻하고 밝은 존재인가. 시간이 어느 모퉁이를 지날지라도 함께 웃음 지을 벗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주의 절반을 얻은 것이리라, 아니 우주를 다 얻은 것이리라.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빛이 잠기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 띈 빛으로 편히 가시오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거나 친구 내 친구 편히 가시오 그대의 꿈에 비치이던 그 달은 아침 비칠 때 어디로 갈까 검은 구름 위로 이리저리 퍼질까 장미 동산 안에서 숨어 있을까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거나 친구 내 친구 편히 가시오 -고별의 노래- 이..

시와 사랑/ 정숙자

시와 사랑 정숙자 사랑이라는 음계에 손을 넣으면 피가 묻어 나온다. 사랑이라는 성전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다가가 보면 황홀하고 문을 열면 사라진다.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색이 빨강․노랑․파랑이라면 사랑에는 그리움․외로움․기다림의 원소가 있을 것이다. 이 삼원소는 사랑 안에서 빚어질 수 있는 행불행의 모든 파장을 지니고 있다. 그 현란한 굴곡에서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사랑은 아픔을 축으로 한다. 태초의 인간 아담조차도 이브를 얻기 위하여 갈비뼈 하나 들어내지 아니했던가.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이 점 너는 확실히 해야 해. 너는 갇혀 있느니라, 내 마음속에: 그 열쇠는 달아나 버렸으니: 너는 영원히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 않을 수 없어라. -무명시가(無名詩歌)- 이..

시와 편지/ 정숙자

시와 편지 정숙자 편지는 은허문자 이래로 가장 순수한 글이다. 대중에게 읽힐 것도 아니요, 오로지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마음을 선사하는 일이다. 자판만 두들기면 상대방 컴퓨터 모니터에 휘뜩 들어가 박히는 e-메일과는 다르다. 나만이 선택한 종이가 다르고, 나만이 굳혀온 필적이 다르고, 나만의 기호인 잉크 색이 다르다. 뿐일까, 편지에는 유일무이의 지문이 담긴다. 누군가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든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포개어진다. 시내버스 요금에도 못 미치는 우표 한 장이 정갈한 육필과 함께 어느 우편함에 꽂히었다면 그것은 촉수를 잴 수 없는 빛이 이 세상 한 귀퉁이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하늘 높이 슬픈 노래가 저 철교 위를 흐른다. 기차가 ..

시와 고요/ 정숙자

시와 고요 정숙자 1 고요는 풍력 0급에 해당하는 바람이다. 초속 0.0~0.2m. 그러므로 연기가 곧장 위로 올라간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바 없고, 흔들어도 나부낌이 없으며 만지려 해도 형체가 없다. 그 무색투명한 고요는 그러나 분명하고도 견고하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고요는 하늘 아래 첫 번째로 아늑한 기슭이요, 집이다. 오늘도 나는 그 곳을 그리워한다. 삶의 피로가 엄습할 때마다 돌려놓고 싶은 시간은 과거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고요다. 그 고샅에서는 지혜조차 진부하다. 맑고 따뜻한 영혼만이 거주할 수 있는 그 곳의 시민권을 나는 어디서 박탈당한 것일까.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하니 언사채약거(言師採藥去)라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이나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라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님은 약..

시와 생명/ 정숙자

시와 생명 정숙자 지구는 전체가 비탈이다. 가파른 하늘 아래 나무로, 엉겅퀴로 혹은 곡식으로 생명들이 뿌려진다. 천차만별 부화된 떡잎들은 풍우에 나부끼고 햇빛에 그을리며 물것들에게 시달림을 받는다. 그런 가운데 뿌리내리고 꽃 피우며 가능한 한 열매도 맺어야 한다. 그 한바탕의 소용돌이를 우리는 생애라고 일컫는다. 궁극적인 고독에 위안이 되어줄 또 하나의 나는 어디에도 없다. 자아가 뿜어낸 가지와 잎새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는 홀연히 본디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번다한 여정이 불과 백 년 안팎의 인과다. 그러나 간혹 오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자취를 남기는 이가 있으니 그는 곧 땀방울로 눈물을 식히며 분골쇄신 자신의 삶을 예술화한 이름들이다. 모동야인거(茅棟野人居)이니 문전거마소(門前車馬疎)로다 임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