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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보호무역/ 김영

파도 보호무역 김영 해안은 음모를 거래한다 이 파고를 다독이지 못하면 더 높은 바람이 찾아온다 수평선이 오늘도 몇몇 사건을 보내온다 집어등은 늦은 새벽까지 물결의 동선을 추적한다 해외 직송의 물품은 좀 더 찰랑이는 상품으로 바꾸어 팔기도 한다 매진되기 전에 주문하라는 광고를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질 좋은 부패는 유통기한이 지날수록 싱싱하다 각종 물목이 차오르는 해안에서는 한물간 파도가 최신 유행이다 - 전문 (p. 30)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영/ 1996년 시집 『눈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등단, 시집『벚꽃 지느러미』『파이디아』『나비편지』외 다수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거울 속 한 송이 꽃 외 1편 한이나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아득한 연결점의 누군가를 허공에서 꺼내본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사람 아버지, 거울 속 나를 뜯어보면서 그 누군가의 성향과 정서와 용모 그 무엇이 그에게서 내게 전해 왔는지 자식에서 자식 다시 자식까지 뿌리를 내려다보며 기질까지 낱낱이 유추해 본다 내 안의 피와 살과 뼈를 준 숫자와 기호들 살아 무성했을 말과 공허했을 몸짓들 전전긍긍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만도 덕분이라고 물결무늬 감정이 레테 강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은총의 실마리를 찾아 간신히 바늘귀에 꿰어놓는다 누구를 닮은 것일까 어떻게' 꽃 한 송이로 피어 있을까 나는 -전문(p. 28-29) ----------------------..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