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 93

강현국_ 떠도는 자의 고독/ 폐차장 : 이하석

폐차장 이하석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을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히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 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

지나가는 사람/ 유희선

지나가는 사람 유희선 제발, 지난밤의 모든 역을 함께 통과한 듯 민낯을 보여주지 않기를 막무가내인 그녀는, 고무줄 같은 궤도를 탱탱하게 늘이고 있다 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자꾸 발이 빠진다 다크써클이 사라지고 주근깨처럼 박힌 점들이 순식간에 행방을 감춘다. 거울을 바짝 대고 눈썹을 공들여 그린다. 오른쪽 왼쪽 최대한 평행으로 전철은 내달리고 컬링 집게로 속눈썹까지 바짝 말아 올린다 지금쯤 어느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솟구쳐 오르고 있겠지 누군가 부푼 치맛자락을 지그시 누르며 지나갈 동안 그녀는 마스카라를 두껍게 칠하고 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역 사이에서는 루주를, 드디어 그녀의 아침은 붉게 밝아오고 나는, 나의 민낯과 누드가 아름다웠던 때를 아득히 떠올린다 야금야금 허리둘레가 늘어나는 순환 전철 안에..

킨츠기 교실/ 서윤후

킨츠기 교실 서윤후 선생은 시즈오카현 출생 녹차의 고장에서 태어났기에 언덕에 대한 이해가 깊다 각자 가져온 접시는 모두 깨진 것이다 조각을 이어 물결 무늬로 만들 수 있겠군요 깨진 곳 사이사이가 다시 친해지도록 작은 홈을 이어 반짝임을 그려낼 수 있을 거예요 금이 간 것을 숨길 수 없으니 더 빛나도록 그렇게 접시의 깨짐을 붙여 메우는 것이 킨츠기예요 상처를 아름답게 발음할 수 있었다 핀잔도 핏기도 없이 녹차를 호호 불며 마시던 선생은 각자 깨진 것과 그것을 메우는 시간을 차분히 기다려 준다 언덕을 가르는 기다림을 해본 적 있나요? 선생은 어느 날 가와구지코 호수가 그려진 엽서에 그런 질문을 적어준 적이 있었다 한국말은 어눌하고 학생들 솜씨는 서툴렀으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매달린 시간이 길었다 이어 붙인 대..

가난했던 어린 날 외 1편/ 서상만

가난했던 어린 날 외 1편 서상만 학급비 납기를 세 번이나 미룬 날, 나는 밤새도록 그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학급비를 갖고 학교에 가야 한다, 선생님과의 삼세 번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우울과 공포 때문에 아침밥도 거른 내 독특한 표정이 곧바로 어머니한테 전달되었다 그런 나의 성화에도 '오늘은 안 된다, 집안에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다 아이가 만아 내가 오늘 꼭 준비해 볼 테니 오늘은 마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내일은 꼭 가져오겠다고 말씀드려라'고 무척 단호하셨지만 나는 같은 말을 너무 자주 들은 어머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드디어 나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실,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읍소작전이다 울음의 음률은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제법 부드럽기도 한 평상 ..

생존연습(生存練習)/ 서상만

생존연습生存練習 서상만 사람들은 하늘에 매달리거나 물에 둥둥 뜨면 가벼워진다 그 누구의 몰골이냐 정신 놓지 말아라, 魂 줄을 놓는 순간 길 잃은 별똥별이 되거나 천근만근 무거워진 폐선으로 오래오래 갈앉아 물귀신이 되는 거다 끙끙 앓는 소리라도 내 보렴 살아있다는 건 숨 쉬는 것 숨만 쉬면 죽지는 않는다는 것 존재 증명이란 죽기보다 더 어렵다 -전문- 해설> 한 문장: 1982년 41세에 『한국문학』으로 등단한 서상만 시인은 2007년 첫 시집 『시간의 사금파리』를 발간한 이후 제15시집 『생존연습』(2024)을 간행하기까지, 지극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시작詩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앞서 한 문장으로 가늠해 본 시인의 이력履歷에서도 짐작되듯이 비교적 늦은 등단과 25년 만에 첫 시집을 상재한 사실을 주목..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폐교 작업실에서 혼자 잠들면 달밤에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나고 몇 밤 더 지나면 지붕 뚫어져라 천지를 때리는 솔방울 소리 야심한 밤 폐교에서 메아리칠 거요 -전문(p. 7)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최동호/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미래서정, 열두 번째의 의미, 어디로 가란 말이냐(전문)/ 정혜영

미래서정, 열두 번째의 의미, 어디로 가란 말이냐 정혜영/ 시인, 서정시학회 회장 『미래서정』 열두 번째 앤솔로지다. 열둘, 의미 있는 숫자이다. 소년이 소년이 아니게 되는 나이. 마그네슘(Mg)의 원자번호. 탄소의 원자 질량은 12, 이것은 다른 원소의 원자 질량 지정의 기준이 된다. 연필 한 다스는 12자루, 12월은 그레고리력의 마지막 달, 올림포스 12신. 예수의 열두 제자. 음악에서 한 옥타브는 12개의 반음 간격이다. (피아노 건반이 열두 개라는 뜻) 12는 완전한 주기. 우주의 질서를 상징한다. 3×4=12에서 3은 신, 4는 인간을 의미해 12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조화를 의미한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는 땅의 토질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 ..

권두언 2024.03.28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노래/ 김산

中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노래 김산 내일의 심장은 어떤 모양으로 두근거릴까 이건 비문이어서 오늘의 뉴스는 적확하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날씨를 사랑해 폭염 혹은 폭우 그리고 기꺼이 외따로운 것들 올해는 장마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짧은 비가 다녀갔고 이 세계는 잘 구운 바게트 같아 한낮, 카페에 앉아 있는 쌍쌍의 연인들 사막 같아,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마음들은 어디서 불어온 것인가, 이런 평화로운 소란이여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이별과 가까워지는 거야 알면서도 모른 척 재잘거리는 회색앵무새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존중해 그렇다고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어두운 것들, 빛을 잃어서 더 환해지는 저녁이여 저 가로등은 한 번도 고갤 들은 적이 없어 슬픈 목이여, 구부러진..

쑥을 캔다/ 이준관

中 쑥을 캔다 이준관 들녘에서 아낙네들이 쑥을 캔다 손에 쑥물이 밴다 "봄볕 참 좋지예" "하모, 그렇고말고예" 야들야들한 쑥의 허리를 가진 그녀들 그녀들의 몸에서 코 끝을 톡 쏘는 알싸한 쑥 향기가 난다 어느 집에선가 쑥국 끓이는 쑥빛 연기 몽실몽실 솟을 것만 같은 봄날 쑥국 한 그릇에 아이들은 해 바른 양달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쑥국새처럼 노래 부르며 고무줄뛰기 하겠다 -전문(p. 17) ------------------------- * 【한국시인협회 제65회 정기총회 부클릿】에서/ 시상식 2024. 3. 27(수)_16 : 00.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 프레스 클럽 * 이준관/ 1949년 전북 정읍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산, 1974년『심상』 신인..

종소리/ 손민달

종소리 손민달 땅 속에는 거대한 종이 있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새싹들이 한꺼번에 눈 뜰 리 없지 수많은 매미들이 일제히 세상에 나올 리 없지 그래서 굼벵이도 씨앗도 제 몸에 귀가 있다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큰 종을 사람이 친다는 말이 있어 혹독한 겨울 지나 온 땅 간질이는 새싹 돋는 일과 숨 막히는 여름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겠어 사람들은 큰 종을 울리기 위해 수신자 없는 편지를 눌러 쓰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울기도 한다지 어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이 스스로 종이 되어 울기도 한다는데 어느 따뜻한 봄날 갑자기 울렁이는 가슴과 여름밤 내리는 소나기에 누군가 그리워 우는 것이 명백한 증거라고 땅속에는 사람들이 울리는 소리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