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31

김경성_이 계절의 시/ 서정가(抒情歌) : 신석정

서정가抒情歌      신석정(1907~1974, 67세)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 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전문 (韓國現代詩文學大系 11 『辛夕汀』, 1985. 智識産業社, 64쪽)   ▲ 신석정(辛錫正, 1907~1974, 67세)/ 전북 부안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호 및 필명은 석정石汀, 夕汀, 釋靜,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

임승빈_별에 이르는 길(발췌)/ 저녁에 : 김광섭

저녁에 김광섭(1905-1977, 72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문- ▶별에 이르는 길(발췌)_ 임승빈/ 시인 이 시는 1969년 11월에 발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시집을 사고도, 이 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목차에 보면 이 시는 83쪽에 있어야 하는데, 내 시집은 77쪽부터 96쪽까지가 없었다. 파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군 복무 중이던 1976년 초봄에 외출을 나갔다가 전주에 있는 에서 1975년 에서 나온 김광섭 시선집 『겨울날』을 샀고, 거기에서 비로소 이..

박순원_우리시 다시 읽기(전문)/ 창의문외 : 백석

창의문외 백석 (1912-1996, 84세) 무밭에 흰나비 나는 집 밤나무 머루 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우물가에서 까치가 자꾸 짖거니 하면 붉은 수탉이 높이 샛더미 위에 올랐다 텃밭가 재래종의 임금林檎나무에는 이제도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고 희스므레한 꽃도 하나 둘 피어 있다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이숭원, 『백석 시, 백 편』, 태학사, 2023, 149쪽, (전문) ◈ '창의문'은 조선시대 4소문 중의 하나로, 1396년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창의..

일없다 외 2편/ 오탁번

일없다 외 2편 오탁번(1943-2023, 80세)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 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전문(p. 19-20/ 『예술원보』66..

상희구/ 오탁번

상희구 오탁번(1943-2023, 80세) 궁핍과 절망뿐이던 1950년대 그 시절 대구 영남중학교 3학년 소년 하나이 학교를 더는 다니지 못하고 제적을 당하였다 신문팔이도 하고 행상도 하다가 대구소방서 사환으로 용히 들어갔다 똘똘한 소년이 꾀부리지 않고 일을 잘 하니 소방서 대원들 눈에 들어서 밥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중학교를 꼭 마칠 생각에 가까운 성광중학교를 찾아갔다 소년은 힘차게 말했다 3학년으로 꼭 넣어 주세요 소년의 말을 들은 콧수염 교장이 말했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생떼를 쓰냐 제적을 당한 놈이 택도 없다 1학년을 다시 다니거라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은 소년은 울면서 소방서로 돌아왔다 소년의 울음소리에 소방서는 빅뱅 0.001초 전의 우주처럼 캄캄한 적막에 휩싸였다 ..

눈사람을 만들다 외 5편/ 신현정

눈사람을 만들다 외 5편 신현정(1948-2009, 61세) 눈과 코를 만들고 코 밑에 생솔가지를 붙여 그럴듯하게 수염을 만들어주고는 적어도 눈사람은 무슨 소리가 뒤에서 나도 서 있는 그대로 앞만 바라보게 했다 세상을 모나지 않게 둥글게 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생각하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앞만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밤에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것을 눈사람에게 시켰는가 말이다. -전문(p. 41) --------- 주먹 꽃에도 주먹이 있나니 한 때를 살고 망가지는 것들은 주먹을 가지고 있나니 주먹이 있기 때문에 서럽고 뜨겁고 망가진다고 말할 수 있나니 오늘 두어 송이 망가지는 주먹이여, 허공에 가만히 들이밀고 가장 고요한 주먹이여, 고요히 망가지는 주먹이여. -전문(p. 15) ---..

이찬_'문질빈빈' 또는 '백비'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사랑 : 김수영

사랑 김수영(1921-1968, 47세)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전문- ▶'文質彬彬' 또는 '백비白賁'의 시학을 위하여(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랑」은 짧은 마디와 작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김수영적 사유의 특이점을 표상하는 "대극對極"과 "양극의 긴장"이 은은한 날빛으로 정제되어 수려한 이미지로 아름답게 채색된 시이다. 더불어 우리 모두의 "사랑", 그 근저에 도사린 불안과 두려운 낯섦을 빠른 리듬감으로 응축된 반복 어구의 탄력과 파장으로 상기시키는, 김수영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어둠"과..

이준관_동심의 아름다움, ···(발췌)/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 오규원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오규원(1941-2007, 66세) 한 마리 나비가 날 때 팔랑팔랑 혹은 나붓나붓 꿈꾸며 나비가 날 때 한 마리 나비가 내는 꿈꾸는 소리 그 작은 소리 없어질까 지나가던 바람이 얼른 가슴에 안고 간다 그리고 그 소리 기다리는 꽃이 보일 때까지 조심조심 안고 다니며 키운다 들어 보라 나비와 만난 바람의 소리를 그 바람 속에는 언제나 꽃에게 전해 줄 팔랑팔랑 혹은 나붓나붓 날며 꿈꾸는 나비의 소리 -전문- ▶동심의 아름다움, 오규원의 동시(발췌) _이준관(시인, 아동문학가) 내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로 등단하고 본격적으로 동시 창작을 하던 무렵 오규원의 동시를 만났다. 시각적 회화적 이미지 중심의 독특한 동시는 나에게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는 동시를 쓴다는 사실..

김미연_실존의 현장과 그 너머 사랑의 광야(발췌)/ 카타콤베 -6.25에게 : 고정희

카타콤베 6.25에게 고정희(1948~1991, 43세) 아버지 호적에 그어진 붉은 줄 30년 잠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붉은 줄 무덤 안에 있었다 가없게도 공허한 아버지의 눈 삼십 지층마다 눈물을 뿌리며 반항의 이빨로 붉은 줄 물어뜯으며 무덤 밖을 날고 싶은 나의 영혼은 캄캄한 벽 안에 촉수를 박고 단절의 실꾸리를 친친 감았다 살아남기 위하여 맹렬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단 한 번 극복을 알기 위하여 삭발의 앙심으로 푸른 삽 곧추세워 무덤 안, 잡풀들의 뿌리를 찍었다. 맨살처럼 보드라운 잔정이 끊기고 잔정 끊긴 뒤 아픔도 끊겨 법 무서운 줄 모르는 욕망을 내리칠 때 눈물보다 질긴 피바다로 흘러 흘러 너 올 수 없는 곳에 나는 닿아 있었다 너 모르는 곳에 정신을 가둬두고 동서로 휘두르는 칼춤 아래서..

김미연_불가적 사색과 현란한 상상력(발췌)/ 이소당 시편 : 임영조

이소당 시편 임영조(1943~2003, 60세) 대학 때 未堂 선생이 주신 아호에 집 堂자 붙여 近園이 써준 '耳笑堂' 걸고 나니, 가가대소 누옥 한 칸이 확 넓어진다 귀가 웃는 집인가? 잠시 엿듣다 가는 바람 코로 웃어도 상관없는 집이다. 머리 어깨 힘 빼고 허파에 든 바람도 빼고 몸 가두면 들린다 시계가 내 생애 좀먹는 소리 마음벽 쩍쩍 금가는 소리 벌어진 틈 다시 메우고 어혈 든 내 혼을 방생하는 집이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 놓는다, 허나 허리 벤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전문- ▶ 불가적 사색과 현란한 상상력(발췌) _김미연/ 시인 · 문학평론가 임영조(任永祚, 1943~2003, 60세) 시인은 1943년 10월 19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황율리에서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