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읽은 나의 시 30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푸앵카레의 우측 : 정숙자

- ⟪내외일보⟫ 2023. 11. 08.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_해설 푸앵카레의 우측 정숙자 행성들이 둥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일들이 모서리를 잃어버린 이유. 그게 다 바람과 천둥과 벼락에 스치다 그리된 것이다. 사철 두고 대신 울어주는 폭포며 풀벌레며 새들이··· 흰 살 드러내고 찢어지는 설해목의 울음을··· 새끼를 빼앗긴 개와 고양이와 염소와 종마의 울음을··· 갑자기 당한 실패와 좌절 앞에 끓어오르는 인간의 울음을··· 누군가 어디선가 울어주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들꽃들이 구름과 돌멩이와 모래알이 둥근 이유는 인간보다 앞서 울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앞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들은 자신의 울음을 끝낼 만큼 둥글어 졌다 그리고 ‘사물화’되었지만 아는 것이다. 둥긂 속에 버려진 ..

[신상조의 문향만리] / 어느 아름다운 날 : 정숙자

- ⟪대구일보⟫ 2023. 7. 2. | 신상조의 문향만리 _작품론 어느 아름다운 날 정숙자 딱 하루만 더 살아라. 그 하루에 뭘 하겠느냐 물으시오면 부모님 산소에 가겠습니다-하겠습니다. 늙은 모습 이대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마음 이대로 고속버스/덜컹버스를 타고 어릴 적 나폴나폴 오가던 길. 그 구름 그 바람 그 무덤 앞에 깊이깊이 절하겠습니다. 어머니- 불러보겠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는 말고 그 무덤가에서 눈감아도 좋겠습니다. ‘가자, 하루가 다 되었다.’ 기척을 넣으시면 저는 그저 ‘예’ 하겠습니다. 자식들을 굳게 믿고 다독이고 사랑하신 분. 어머니는 유독 저를 가엾게 여긴 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를 참으로 가엾게 고맙게 여겼습지요. 부모자식지간이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쏟아부어..

김윤정_주름 접힌 세계, 그 속에서···(발췌)/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 정숙자

< 계간 『예술가』 2023-여름(53)호 中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정숙자 잠 깬 나비가 언덕 위로 날아갑니다. 거미줄마다 이슬이 빛납니다. 바다는 새로운 오선지를 펼쳤습니다. 따로 예술이 필요치 아니합니다. 종이와 펜을 내려놓습니다. 저 또한 스스러울 것 하나 없는 바람이 됩니다. 오랜 소원 이루는 찬란ᄒᆞᆷ이여, 순수는 저의 궁극의 이상입니다. (1990. 9. 8.) 이 삼경 어찌해야 전해질까요? 벼루가 닳아진들 글이 될까요? 붓끝에 뭘 먹이면 꽃이 될까요? 밤은 자꾸자꾸 동으로 흘러 창문에 푸른 물 비쳐드는데 어떻게 갚아야 갚아질까요? 죽어서 갚아도 갚아질까요? 이 침묵 어찌해야 뜻이 될까요? -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예술가』, 2023 봄) 전문 ▶ 주름 접힌 세계..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동역학 : 정숙자

- ⟪내외일보⟫ 2023. 1. 11.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_해설 동역학 정숙자 하나둘 우물이 사라졌다 마을과 마을에서 ‘깊이’가 밀려난 것이다 우물물 고이던 시간 속에선 두레박이 내려간 만큼 물긷는 이의 이마에도 등불이 자라곤 했다 꾸준히 달이 깎이고 태양과 구름과 별들이 광속을 풀어 맑고 따뜻한 그 물맛이 하늘의 뜻임을 알게도 했다 하지만, 속도전에 뛰어든 마을과 마을에서 우물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고를 담보하지 않아도 좋은 상수도가 깔리자 물 따위는 쉽게- 쉽게- 채우고 버릴 수 있는 값싼 거래로 변질/전환되었다 엔트로피의 상자가 활짝 열린 것이다 가뭄에도 희망을 지켰던 우물 속의 새 언제 스쳐도 깨끗하기만 했던 우물물 소리 그런 신뢰와 높이를 지닌, 옛사람, 무명 옷깃 어디서 다시 만날까 그..

김태신_시.가.마가 선정한 좋은 시/ 고유 시간 : 정숙자

고유 시간 정숙자 열셋, 그때, 나는 미래를 팔아 시를 샀다 그것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장차 그것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도 모르고 한 꼬투리의 의문을 품거나 영문도 모른 채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수면에 비친 하늘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한 나는 한낱 ‘시’라는 공간의 얼뜬 지느러미에 불과했으나 파고波高의 율동에 끼어 쉴 새 없이 아가미를 여닫았다 잠들 때조차 모자란 눈을 감지 못했다 여타의 인내와 고뇌와 얼핏얼핏 스치는 황홀 따위를 조각조각 전신에 이어붙이며, 언제였던가 섬 한가득 피 흐르던 밤, 나는··· 없는 발을 수초에 묻고 별들의 산란을 바라보았다. (저건 필시 달의 사유/ 부스러져나간 달의 육체와 정신일 거야) 헤아리고는 어둠의 기하학을 아스라이 이해하였다 바다에는 때로 용龍이 오르고 해적이 살고 삼..

박대현_과거에의 대면을 통한 주체의 확장/『문파』정숙자 소시집(전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7 정숙자 매일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어떤 새가 당신께 전해주나요? 기도의 봉투에 곱게 쌌지만 주소도 우표도 없는 편지를 당신의 우체부는 눈이 밝아서 이름자만 보고도 길을 아나요? 단 ᄒᆞᆫ 번 눈 속에 피는 흰 꽃을 넣어 보낸 편지도 받으셨나요? (1990.7.5.) _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세월 저쪽의 고양이가 어찌 됐나 뚜껑을 열어봤더니, 아직도 어리디어린 그대로의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8 사랑은 노상 저를 버리고 당신한테로 달려갑니다. 새가 껍질을 버리고 창공으로 날아가듯이. 붙잡고 가두어도 소용없는 일, 한 번 떠난 제..

강영환_이 계절의 좋은 시 읽기, 추천/ 신의 : 정숙자

신의 정숙자 바닷물의 밑동은 구름일 거야. 바위일 거야. 폭포일 거야. 빗물일 거야. 우물일 거야. 빗발일 거야. 이슬일 거야. 눈물일 거야. 그 줄기들 어찌어찌 흘러 개울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고. 맺히고 풀리다가 운명적으로… 뒹굴다 꺾이다 여위다 결국. 바다가 된 이상. 바닷물이 된 이상. 이상과 이상. 이성과 이성. 이제는 놓아 보내자, 오래 가둔 슬픔도 하늘 멀리 밀어 보내자. 일사불란 푸른 물보라. 대나무숲 바람을 깨워, 조선소나무 밭 서릿발도 단단히 끼워 철썩~ 철썩~ 순식간에 허공에 지핀 한마디. # ‘썩지 말라’, ‘썩지 말라’고 산소 한 모금 남겨 주고자 파도는 오늘도 저리 산화 -전문, 『시에』 2021-여름호 이 계절의 좋은 시 읽기> 전문: 이 계절에 발표된 숱한 시들을 ..

박수빈_'같이'의 가치(발췌)/ 허무사 : 정숙자

허무사 정숙자 셰퍼드 세인트버나드 러시안 허스키, 풍란 사란 춘란, 부모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 스승, 사랑과 우정, 그들 모두 진심을 채워 기울여 봤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달아나거나 죽거나 시들었다. 오로지 변함없는 대상은… 책뿐이었다. 책은 최소한 백 년은 신의를 지킬 것 같다. 스스로 구기거나 불타거나 찢지 않고, 썩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기본적인 장소에 놔두기만 해도 그들은 토씨 하나, 따옴표 하나 버리지 않고 종이가 삭을지언정 뼈대를 바꾸지 않는다. 진시황처럼 뭔가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나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아니라 병서용갱兵書俑坑을 지으리라. 읽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영혼의 나비이며 산맥이며 길이며 공기이며 태양인 책들을… 허무사 실행하는 내 마지막 날에 내가 만일 내일 아침 주검으로 ..

편지_ 오픈 레터의 우정을 간직하며/ 정숙자

오픈 레터의 우정을 간직하며 -류미야 시인께 정숙자 어느 날 제가 어느 시인으로부터 이렇게나 따뜻한 공개편지를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의 확장 속에서도 그려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내내 수평선 저 너머로, 아니 지평선 저 밖으로 밀려갔던 시간들이 깊이깊이 가라앉은 저의 의식을 흔들며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발표하고, 또 책으로 묶어 묶어내기도 했던 혈흔들이 파도가 쓰러질 때마다 함께 쓰러지고, 일어설 때마다 다시 일어서며 철썩철썩 시야를 적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의, 어쩌면 난자卵子일 때부터 읽고 있었을지 모르는 제 몫의 하늘과 그늘의 중량을 새삼스레 헤아려보게 됐던 셈이지요. 이런 ‘헤아림’은 계획성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파동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동력은 곧바로 우의가 부여한..

편지_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기 위하여/ 류미야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기 위하여 -정숙자 선생님께 류미야 처음 선생님을 뵌 건 수년 전, 한 문학 행사에서였습니다. 정갈하게 비다듬어 틀어 올린 은발과 멀리서도 형형한 눈빛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셨지요. 이후 이런저런 문학의 일들로 더러 뵙는 동안 왠지 제 마음속에는 ‘큰 바위 얼굴’의 상像이 떠올랐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동명의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 어니스트가 일생 기다리며 꿈꾼 위대한 인간, ‘큰사람’의 상징이지요. 높은 생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결국 그에 근사近似해진다는 다분히 교훈 짙은 주제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시인’이 “나의 생활은 나의 사상과 일치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대목과 어니스트가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용모를 가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