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10

온기/ 서양원

온기     서양원    말기암 투병 중의 아내가  간호 끝에 지쳐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는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수만 가지 감정이  등 뒤부터 혈관을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긴 세월의 강을 함께 건너온  그녀의 푸른 성정이 아프게 돋아난다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타까움의 슬픈 연주   이승과 저승의 벼랑길에 서서 보내는  그녀의 진심 어린 연주에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고  손발톱이 빠지고  타들어가는 항암 주사를 수십 번 맞으면서도  내 앞에선 애써 웃음을 보이는 그녀  그녀가 지쳐가는 만큼 나도 지쳐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

새해 아침/ 김지헌

새해 아침      김지헌    백지 한 장이 다시 주어졌다  온전히 비워진 주관식 문제지를 놓고  무슨 문장을 써 내려갈까  무슨 색칠을 할까 잠시 생각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직도 빈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때는 백지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아  쓸데없는 넉서로 채우곤 했었다  무엇을 그려도 수정이 가능했고  지난밤 수없이 파지를 구겨 던졌어도  아침은 어김없이 새 얼굴로 맞아 주었으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빈 종이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고해성사조차 미적거리다  또다시 맞닥뜨린 새해 아침   정답 칸을 하나씩 밀려 쓸 수도  모두 같은 답으로 채울 수도 없는 난감이라니  벼락치기 공부로 눈이 빨개진 아침  앞마당 잡풀 더미에선 분명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 가을 골절된 손..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가본 적도 없는 들은 적도 없는  아마도, 아마도 중얼거리다  꿈길 끝에 열린 아마도엔  물결 따라 넘실거리는  꽃나무 하나 눈부시게 서있네   도망치지 않고 진솔한 마음 따라가다 보면  열일곱 살 볼 붉은 소년이  늙지도 아프지도 않은 풋풋한 모습으로 반기네   마다가카르 바다에서부터 밀려든 해풍이  넘실거리는 파도에 꽃나무를 박은 것인지  꽃나무 때문에 아마도 섬이 된 것인지  자카란다 꽃잎들이 내 손바닥에 어깨에 내려앉네   허리케인이 섬을 뒤집어 놓은 뒤에도  해초랑 멍게랑 가랑어가 꼬리에 물이랑을 띄우며  나뭇가지마다 둥글게 꽃을 피워올리는 생각 밖의 섬   꽃잠에 취한 딱새가 콩새가 물까치가  짝을 찾아 날아오르는  꿈길 밖 아마도를  나도 찾아갈 순 있는..

2월이 오면/ 김미형

2월이 오면      김미형    소소리바람이 지나간다  나무 밑동을 보듬었던 마른 잎들이 그제야 떠난다  박새가 구슬 목소리로 쭈뼛거리는 봄을 부른다  금빛 히어리꽃 타래가 계곡 문을 열면  숲길도 말랑말랑 아는 체한다  강가 수양버들 줄기에 연둣빛이 어룽거리고  퍼렇던 강물도 연하늘색으로 엷게 웃는다  산수유나무에는 직박구리들이 찾아와  안부를 주고받느라 시끄럽다  오래된 집 꽃밭에도  봄 햇살이 시나브로 드나들 즈음  가장 먼저 봄 등 밝히는 수선화  움츠렸던 엄마의 어깨도 노랗게 웃는다   입춘이 흘러가면  겨우내 따뜻했던 우물물이  다시 차가워진다     -전문(p. 18) --------------------- * 『미네르바』 2024-봄(93)호 에서 * 김미형/ 경남 남해 출생, 2003..

김경성_이 계절의 시/ 서정가(抒情歌) : 신석정

서정가抒情歌      신석정(1907~1974, 67세)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 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전문 (韓國現代詩文學大系 11 『辛夕汀』, 1985. 智識産業社, 64쪽)   ▲ 신석정(辛錫正, 1907~1974, 67세)/ 전북 부안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호 및 필명은 석정石汀, 夕汀, 釋靜,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

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언제나 없는 너와  언제나 그리워하는 나 사이에  천 년 전에 새겨두었던 약속은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바람은 어제처럼 빌딩 몇 채의 불빛을  강물 속에 부려놓고 다리 저 끝으로 멀어진다  거꾸로 선 불빛들은 젖은 채로  하늘의 별빛을 출렁이면서 세상  온갖 이야기를 다 흐를 듯하다   지친 다리를 끌며 오후를 건너는 동안  나무는 초록과 단풍을 번갈아 입으며  다시는 꿈꾸지 않으리라던  어느 적막한 날의 울음을 떠올린다   너 없는 봄을 기다리고  너 없는 가을을 작별하고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랜 누각에 빗발치는  맨 처음의 신화를 채록한다     -전문(p. 96-97)      ---------------------   돌다리 전설  ..

수로왕의 골짜기/ 김성조

수로왕의 골짜기      김성조    산이 맑고 들이 아름다운 고을에는 눈빛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이야기는 다산多産의 평화와 그해 농사를 기름지게 하는 물소리를 닮아 있다   어느 해, 하늘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춤추고 노래하며 나를 맞으라 명하신다 구지봉의 북소리 뜨겁게 해를 오른다 붉은 보자기에 싸인 여섯 개의 알 그 중 황금빛 짙은 얼굴 먼저 껍질 깨고 나와 바다를 다스리는 손을 들어 보였다   수로왕의 골짜기엔 해마다 젊은 꽃들이 가지를 벋어 봉우리마다 마을이 들어선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소리의 근원을 채워가기 위해 밤낮의 길이를 처마 끝에 새겨두고 맨발의 새벽나루를 저어간다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강보에 싸여 오늘도 이웃집 담장 너머로 줄기를 낸다 아이들은 단잠에 귀가..

시간성_나의 시를 말한다(부분)/ 삼김시대 : 김건영

삼김시대      김건영    여름밤의 하늘은 구운 김이다  밤에는 구멍 뚫린 곳이 모두 빛난다  저것은 모두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박쥐가 되어버린 천체天體를 아시나요   동전은 모두 하늘로 떨어진다  종이처럼 얇게 골목에 펴 발라진 이것은  김이거나 검은돈   세상에 김 씨가 너무 많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얇게 펴진 마른 종이는 먹거나 먹히는 데에 쓴다   빨려 들어가듯 편의점에 다다르면  벌레들이 가득하다  해태海苔와 눈먼 해태가 있다  구운 김을 검은 간장에 찍어 드셔보세요  이것은 훌륭한 안주安住입니다  원怨 플러스 원怨  무병과 장수가 가득한 편의점으로 오세요  밤 과음過飮 악惡 사이 흥얼거리며  나의 편의를 위해 돈을 씁시다  동전 밑이 어둡다   지불 능력이 있다면  밤에 김을 ..

점(點) 외 1편/ 이정현

점點 외 1편      이정현   나를 위한 면적이 필요하다고 애원했지만 꿈쩍 않던 그가  디큐브아트세터 10분 거리의 위치에서 먹고 자게 하더니만  점 · 점 · 점들이 방출할 때의 숨소리를 읽으라 하였다  역의 출구마다 쏟아지는 점들의 아우성,  눈알보다 바쁘게, 마치 거리의 화면을 꽉 채운 비가  대사를 외듯  움직임이 언어보다 빠르다  나  나  나  점  점  점  오고 감이 없다는 말 집어 전디고  들숨으로 멈춤 한 채, 그에게 따지려니   그가 사람들 틈에서 졸고 있다. 점인 채로  움직임이 요란타    선문답식 시작노트 :  암두巖頭 이르시길  '물物을 물리침이 상上이 되고, 물物을 좇음이 하下가 된다' 하시기에.     -전문(p. 10-11)       ---------    살생   ..

비결/ 이정현

비결     이정현    꽃 같은 나이에  선방에 앉아 있으려니  등 뒤에서 누가 바닥을 톡톡 친다     차 한잔하러 오시게  졸다가 놀라 얼른 스님의 뒤를 따르니      내가 요즘 통 잠을 못 이루는데, 자는 비결이 뭔가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     그냥 앉아 있었다고?   찻잎이 웃는다       선문답식 노트: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고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집 모든 시의 끝에는 위에서처럼 "산문답식 노트"가 달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 노트'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시작 노트와 달리 본문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본문의 영역을 더욱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