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02

슬픔의 깊이와 애도의 시간(부분)/ 전해수

슬픔의 깊이와 애도의 시간(부분) 조디 피코,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 전해수/ 문학평론가 조디 피코의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는 동물학자 앨리스의 일지에 기록된 '코끼리의 슬픔을 이해하는 모습'을 통해서 애도의 방식을 보여준다. 2년간의 임신 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은 코끼리는 분만 중에 새끼를 잃거나 새끼가 자연사하는 경우 더욱이 여러 날을 식음을 끊고 새끼 주변을 배회하며 오랫동안 맴돈다. 그때는 슬픔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어미 코끼리를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문율,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거친 후에 어미 코끼리는 비로소 새끼 곁을 떠난다. (p. 184~185) 스토리를 간단하게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코끼리를 연구하고 돌보는 앨리스와 토마스 부부에게는 어린 딸 제나가 있다. 이외에도 기드..

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문학평론가 · 충북대 교수 (···前略···) 2. '현대 향가'로 몸을 바꾼 '진화사'의 한 사건 호모 사피엔스인 현생인류에게 진화는 생물학적 차원과 더불어 문화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고 놀라움이 섞인 공감 속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주체'로서의 유전자의 꿈과 욕망과 권력에 대한 설명은 인간들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자아의식과 주체의식을 무색하게 만든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도킨스의 유전자 주체 이론은 인간의 자아의식이야말로 인연법에 의하여 가설된 '의식'의 형태에 불과할 뿐 '자아'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한..

시의 시대는 갔는가?(부분)/ 구모룡

시의 시대는 갔는가?(부분) 구모룡/ 문학평론가 시의 위상이 궁금하다. 문학 내의 위계가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비중 말이다. 아울러 시인의 위치도 의문이 간다. 역시 문학장 내부의 위치가 아니라 사회적 자기를 알고 싶다. 물론 이와 같은 사회학적 물음에 쉽게 답이 주어질 리 없다. 대중을 상대로 시와 시인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는 질적이고 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단지 오늘의 시를 누가 얼마나 읽느냐는 독자의 문제가 아니다. * 시의 사유화는 개성을 상품으로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장 원리와 무연하지 않다. 물론 시는 강력하게 반자본주의를 천명하면서 감각의 특이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몇몇 노동 시인과 대안을 지향하는 생태 시인을 제외하면 시적인 것을 자기 지시적인 언어로 회수하는 탈정치적..

우리 시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박수빈

우리 시가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박수빈/ 시인 · 문학평론가 만물이 급변하는 요즘, 혼란스러울수록 맑은 의식과 정체성을 찾게 된다. 예술을 통하여 인간은 정신의 고귀함을 일깨워 왔다. 나무가 그렇듯이 뿌리가 튼실하면 세태라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유 시가의 뿌리는 향가鄕歌다.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서 향찰鄕札로 표기했으며, 진성여왕 때 대구 화상과 각간 위홍이 편찬한 『삼대목』은 향가 전문 사화집이다. 향가라는 명명에는 당시唐詩가 아닌 우리나라를 강조한 '국가國歌'로 주체적인 의지가 있다. 형식은 초기의 4구체에서 발전된 8구체, 삼국 통일기에 정형화된 10구체가 있다. 낙구 첫머리에 '아야阿也' 영탄구는 훗날 시조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전승된 향가를 통해 우리는 미학적이며 서정적인..

2023_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부분들

2023 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 『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 부분들 이재은 외 * 이재은_「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中 열다섯의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박분분의 손에 맡겨졌다. 박분분은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천 원 이천 원을 쥐여주거나 그녀의 지갑에서 잔돈을 흠쳐 하드를 사 먹고 돌아오는 일탈을 눈감아주었다. 나는 캄캄한 방에서 눈 감는 일을 무서워했는데 박분분이 배를 문질러주면 조금 안락해졌다. 껍질을 칼로 깎았는데도, 그래서 과도가 눈앞에 있는데도 박분분은 입으로 과실을 베어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그런 박분분에게 의지했다 내성적이고 붙임성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바깥세상을 탐하기보다 책에 빠져 살았다. 소설은 나를 고독하고 안전하게 놓아둘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경험을 대신해주었기..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배려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이 용어에 대해 누군가는 다시 딴지를 걸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미등단이라는 말과는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냐고요. 어감이 조금 달라졌을 뿐 비등단과 미등단, 이 둘을 체감하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괜히 배려하는 척 허울 좋은 용어로만 대체해서 부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마치 '지방'을 대신하여 '지역'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서울 중심의 구도에서 소외된 지방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미등단 대신 비등단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등단하지 않은 이들의 현실적인 여건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까요? 비등단자든..

배홍배_시에세이『빵 냄새가 나는 음악』/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음악가들의 마지막 남긴 말 - J.S. Bach- Come, Sweet Death 배홍배 □ 바흐: 내 죽음을 슬퍼 말아라. 난 음악이 태어난 곳으로 간다. 그의 임종을 지키던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다. (p. 420) □ 하이든: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잘 살았다.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이든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하인들 집에 대포 탄이 떨어지자 그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p. 420) □ 모차르트: 죽음의 맛이 입술에서 느껴진다. 이 맛은 세상의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에도 천재다운 말이다. (p. 420) □ 베토벤: 애석한 일이다, 아 너무 늦었어. 그가 주문한 와인이 제날짜에 도착하지 않고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와인을 받..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_어떻게 쓰는가/ 오세영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 오세영 3. 어떻게 쓰는가 세간의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아집我執에서 생긴다. 자아에의 집착을 제거하면 세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화엄경』 제22장「십지품十地品」]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전』에는 여러 좋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중에서도 『화엄경』에 있는 경구를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시창작의 본질을 설파해주는 촌철의 비의秘意가 적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한 것을 시라 믿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의 주체이지요. 주체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생각' 역시 진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도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

날 외 1편/ 김윤

날 외 1편 김윤 지는 해를 보다가 나도 저물다가 주머니에 손 넣으면 조선 칼 하나 있다 날은 닳아서 서러운 아무 것도 베이지 않고 상처는 질겨서 찢겨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자꾸 사랑이라고 항변할 때 칼에 독이 있다 목숨 바꾸어 베어 낼 무엇이 틀림없이 내게 있었던 거다 날이 제 힘을 다하느라 상했다 이제 벼리지 않을 거다 큰 절 아래 골목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어서 젊은 장인이 금방 나온 쇠를 허공에 몇 번이고 세워보면서 흰 날을 일으켜 붙잡는다 칼긑을 담금질하는 치밀한 시간 꽃이 지고 봄이 가고 날 끝에 파랗게 독이 섰다 베어야 할 것들이 문득 다 사라졌다 -전문(p. 16-17) ------------- 순장자 거긴 언제나 밤이어서 그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귓바퀴 뒤쪽 물렁뼈를 타고 칠흑 같은 슬픔..

김언_'기술창작시대'의 문학과 인공지능(발췌)/ 오래된 집 : 시아(SIA)

오래된 집 시아(SIA) 나는 오래된 집에 산다 생나무를 때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렇게 튼튼한 나무들 사이에서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 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 보며 시간을 짐작한다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담그셨고 아버지는 평생 술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심어 둔 나무의 가지를 하나씩 흔들어 본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지를 아주 많이 펴야 한다 지붕의 이끼는 매년 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며 아버지는 자주 바람 속에 나무의 나이테가 없다고 노래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엔 누구나 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처럼 되어 간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나는 점점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