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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 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 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 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전문(p. 144) -..

호모 마스쿠스/ 강명수

호모 마스쿠스 강명수 몸살 앓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온다 감 이마에 발갛게 열이 오른다 식은땀 흘리는 꽃무릇 온몸에 발진이 돋는 석류 재채기 콧물 흘리는 옥잠화 으스스 떨며 나팔꽃이 창문을 닫는다 끙끙, 한바탕 휘젓고 가는 신음처방전엔 햇살 감기약 먹고 한 사나흘 앓고 나면 거뜬하게 일어날 거라고 주르륵 쏟았던 빗줄기 감아올린다 그렇게 한나절 지나는가 싶었다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이 들어온 바이러스 자객의 칼 앞에 울안의 천리향이 늘어지고 동백 모가지가 뚝뚝 떨어지고 수선화가 노랗게 질려 오그라질 때 게릴라전을 벌이며 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날마다 스마트폰에는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밀폐된 공간에 모임 삼가기 사회적 거리 두기 안내 문자가 꽃눈처럼 날아든다 검은 공포심이 지피에스처럼 따라다니고 ..

황치복_개성적인 작시술, 혹은···(발췌)/ 녹슨 천사의 트럼펫 : 김정범

녹슨 천사의 트럼펫 김정범 어느 행성의 버려진 공포인가 푸르른 향기는 지워졌다 붉은 숲에 바람이 일고, 빛에 그을린 삭정이가 어지럽게 떨어진다 귀가 잘린 잿빛 고양이는 가시덤불에 몸을 숨기고, 굶주린 늑대의 꼬리에서 파란 가루가 번득인다 찢어진 눈으로 짐승을 쫓고 있는 팔 없는 인형 하늘에서 녹슨 천사가 트럼펫을 들고 어둠을 벗기며 음관을 연다 하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갈라졌네 깨진 조각이 얼굴에 박히고 방열판이 녹아내렸네 허공에서 신의 말이 번쩍거렸네 램프의 빛을 따라 실험지가 흩날리고 해골 구름이 입을 열었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숲을 적시는 이지러진 소리 방사선의 밤 위로 연둣빛 야광 음이 흐른다 그녀는 옷을 벗는다 자라난 발톱이 흙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수직의 안테나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