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111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사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힜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얼굴을 때리고 싶은 상황을 설명하고 그럼에..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진열은 사열이다 : 김송포

- ⟪내외일보⟫ 2024. 03. 22.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_해설 진열은 사열이다 정숙자 시인의 서재 김송포 군인의 아내로 사는 일은 사열하는 것이다 사열하는 것은 정돈이다 사열보다 중요한 것은 서열이다 서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릇은 오래된 것부터 새로운 것까지, 음식은 발효된 장아찌부터 말린 부지깽이와 최근 무친 나물까지, 하물며 책장에 진열된 책은 태어나기 이전의 족보부터 손글씨로 쓴 연모의 구절과 액체계단의 사건과 지독한 쓸쓸함과 아픔이 병사의 도열처럼 흐트러짐 없이 장렬하다 가장 귀한 것 중의 하나는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올린 시집이 이중 대열로 한 치의 착오 없이 서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집에 가서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이름이 없다면 유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작은 문화를 쓰는 것이..

오태환_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부분)/ 저녁연기 : 오탁번

저녁연기 오탁번(1943-2023, 80세)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전문- ▶자기 응시의 순정하고 오연한 형식(발췌) _오태환/ 시인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짜여진 이 시는 소설 「저녁연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차이가 있다면, 쉼표의 위치가 "퍼져 오르다가는" 뒤에서 "넘어와서" 뒤로 옯겨진다는 점이다. 소설은 군청 공무원인 화자가 형의 갑작스..

이정현_'원서헌'에서 오탁번 시인을 만나다(부분)/ 백두산 천지 : 오탁번

백두산 천지 오탁번(1943-2023, 80세)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 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

못/ 김광선

못 김광선 언제부턴가 구두를 신으면 왼쪽 발이 아팠다. 가만히 살펴보니 새끼발가락 관절이 있는 곳에 '못'이 박혔다. 원래는 굳은살이라 하겠지만 치이고 또 치이고 동동거리면서 같은 곳으로만 힘을 지탱해야 했던 자리 나는 그 곳에 못을 치고 있었다. 헐렁한 작업신발 빡빡한 삶으로, 헐떡거리며 들숨날숨처럼 쾅쾅 못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옹이진 자리였다. 희망이라며 생업이라며 절벽 끝에서 버티었던 자리, 오늘 그 고통을 사포로 문지른다. 생살이 싸락눈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있다. -전문(p. 240) ▣ 몸과 몸의 교차점에서 흘러넘치기/ - 다섯편의 신작시 속에서의 몸(발췌)_이병금/ 시인 어느새 둘러보니 절벽 끝에 자신의 몸이 서 있다. 몸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육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길이 시작하면서부터 ..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구름 농사 : 유재영

구름 농사 유재영 일용할 이슬 몇 홉, 악기 대용 귀뚜라미 울음 몇 말, 언제고 떠날 추녀 끝 초승달, 책 대신 읽어도 좋을 저녁 어스름 아, 그 집에도 밥 먹는 사람이 있어 하늘 한 귀퉁이 빌려 구름 농사짓는다 -전문- ▣ 구름 농사와 인공 자연/ 유재영의 『구름 농사』, 구름 농사를 짓다 (발췌)_이병금/ 시인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 등 신체의 모든 감각을 마치도 마술사처럼 통시적으로 감지해내는 것은 그의 시를 선명한 색깔과 형태로 도드라지게 한다. 그의 시가 자연을 압축, 재현하여 기호화에 성공한 이유는 기억의 지층 속 오래 살아남은 감각 촉수들의 강렬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체들, 그들의 얽혀듦의 장인 고요, 적막, 여백, 빔을 창작 방법론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나비가 날아간 깊이 : 이진희

나비가 날아간 깊이 이진희 눈, 부셔 허공을 가차 없이 후려쳐 벤 듯 총성이 터지기 직전 하염없이 반짝이던 차고 새하얀 겨울 산비탈처럼 폭포 소리 무심한 해안 절벽의 지나친 아름다움처럼 유해의 흔적마저 없이 얕은 음각으로 남은 이름 -전문- ▣ 그녀는 그럼에도 시를 쓴다/ 1. 처음 빛에 매혹당하다(발췌)_이병금/ 시인 「나비가 날아간 깊이」에서 빛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눈은 그녀 자신의 내부로 한없이 빠져들어 그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 단단한 바닥에서 갑골문자처럼 오래된 언어를 만난다. 유해의 흔적마저 없는 이곳은 죽음조차 미끄러지는 빛의 피부일까. 그녀가 이끌린 매혹의 순간은 그녀만의 것이기에 육체 밑바닥에 침전물로 쌓인 언어의 사리들로 잡혀지지 않는 빛의 몸을 그려보고자 한다. 아니 빛의 육..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우대식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 우대식 오늘도 먼 데를 오래 바라보았으나 수평선에 눈을 맞추었으나 해가 제 몸을 다 우려 우는 다 저문 때에 대문을 닫네 사람의 말 중 가장 슬픈 단어는 사랑임을 되뇌며 묵은 나뭇잎 같은 마음의 문을 꼭꼭 여미네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을 지는 메꽃에 마음을 두고 문을 닫아거네 사랑도 잘못 박힌 못을 뽑아버리듯 박힌 잔가시를 살이 천천히 뱉어내듯 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 몽돌처럼 둥글어질 수도 있으련만 해는 지고 사람 많은 거리에 한 사람이 없네 온 몸이 눈물이라 물의 슬픔은 물의 울음은 드러나지 않네 - 『다층』 2008-가을호 / 전문 단평> 中: "눈물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일엔 죄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눈물에는 정화와 용서의 효능이 있..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