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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한 _ 타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발췌)/ 화장(火葬) : 이영주

화장火葬 이영주 여인이 강가에 앉아 탯줄을 태우고 있습니다 아이의 목을 휘감던 탯줄을 잘라내고 하얗게 질린 아이의 영혼을 먼 땅으로 보내기 위해 여인은 바구니를 띄웁니다 두 손을 모으고 폭염에 달아오른 별을 빨아들이다 툭툭, 붉은 물집이 터지는 여인의 뒷목 알 수 없는 주문이 물살에 떠밀리며 휘청거립니다 타오르던 연기가 올라가 박힌 뜨거운 별들 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의 흉터들, 여인이 불러낸 주문은 흉터 속에 봉인된 채 함께 썩어갑니다 어디론가 떠밀려간 바구니의 목을 휘감고 두꺼운 꼬리를 탁탁 내리치는 거친 물살 온몸이 점점 녹아가는 여인은 불구덩이를 끊임없이 쑤셔댑니다 얼굴 없는 아이가 불길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걸어온 지친 소가 강물에 머리를 담그로 자갈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열에 들뜬 콧김이..

점자블록/ 옥인정

中 점자블록 옥인정 길마다 아빠에게는 노란색 전용도로가 있다 톡톡, 톡톡 거기에서 아빠는 하얀 지팡이로 땅을 노크한다 톡톡, 톡톡 손가락보다 예민해지는 아빠 발바닥 톡톡, 톡톡 쭉 가라는 줄무늬블록 길가에 시설물이나 돌기둥이 툭 나와 있으면 멈추라는 동그랑무늬 블록 지팡이를 쭉 길게 빼서 책을 짚으며 간다 톡톡, 톡톡 노란색 전용도로 두 번씩 점자를 노크하는 하얀 지팡이 톡톡, 톡톡 -전문(p. 236-237) * 심사위원 : 김동수(시인_심사평) 이구한(문학평론가) 김영진(시인)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호 에서 * 옥인정/ 전남 무안 출생, 2021년 ⟪전북문단⟫ 95호 시 부문 & 2023년『미당문학』으로 동시 부문 당선

동시 2024.04.06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무협지 속 우리는 순간순간 죽지 못해 적이 됩니다 권법을 정독한 고수가 아니라서 말의 혈만 찌르는 자객들 서로에게 긍정만 겨누지 못합니다 태양 아래 우뚝 선 두 그림자 아래 당신의 긍정과 나의 긍정은 방향이 달라 말이 달리면 온통 찢어지는 세상 같아 우린 종로를 누비다 강호고등어구이집에서 간신히 두 젓가락을 든 무사가 됩니다 안녕의 맛이 이처럼 담백하니 무적의 고등어를 오늘의 진정한 고수로 인정합시다 말과 말을 거쳐 온 자객 하나, 자객 둘······ 안녕의 목이 계속 베입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 앞에서 가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당신 안녕엔 착한 그림자와 착한 바람과 착한 지상이 필요한데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쓴 말들로 무성한 무림은 계속되어 우리의 안녕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바람이 조용하고 맑은 햇빛을 동그란 탁자 위에 놓고 갑니다. 저는 이 꽃다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당신께 갑니다. 당신의 초대에 늦을까 봐 서둘러 눈을 감고 지름길로 ᄀᆞᆸ니다. 당신은 사원이나 궁중에 아니 계시고 무한한 대기 중에, 공기 중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장소는 언제나 제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골ᄍᆞ기임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1990. 9. 20.) 방금 samsung man이 다녀갔습니다. 냉장고 야채박스 밑에 자꾸만 얼음이 깔리기 때문이었어요. 거뜬히 A/S를 마친 뒤 그는 뭐 더 불편한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기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20년은 족히 넘었을 소형 분쇄기를 꺼냈습니다. 바쁠 텐데도 그는 분쇄기를 해체/조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