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001

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맨 처음의 신화 외 1편      김성조    언제나 없는 너와  언제나 그리워하는 나 사이에  천 년 전에 새겨두었던 약속은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바람은 어제처럼 빌딩 몇 채의 불빛을  강물 속에 부려놓고 다리 저 끝으로 멀어진다  거꾸로 선 불빛들은 젖은 채로  하늘의 별빛을 출렁이면서 세상  온갖 이야기를 다 흐를 듯하다   지친 다리를 끌며 오후를 건너는 동안  나무는 초록과 단풍을 번갈아 입으며  다시는 꿈꾸지 않으리라던  어느 적막한 날의 울음을 떠올린다   너 없는 봄을 기다리고  너 없는 가을을 작별하고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랜 누각에 빗발치는  맨 처음의 신화를 채록한다     -전문(p. 96-97)      ---------------------   돌다리 전설  ..

수로왕의 골짜기/ 김성조

수로왕의 골짜기      김성조    산이 맑고 들이 아름다운 고을에는 눈빛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이야기는 다산多産의 평화와 그해 농사를 기름지게 하는 물소리를 닮아 있다   어느 해, 하늘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춤추고 노래하며 나를 맞으라 명하신다 구지봉의 북소리 뜨겁게 해를 오른다 붉은 보자기에 싸인 여섯 개의 알 그 중 황금빛 짙은 얼굴 먼저 껍질 깨고 나와 바다를 다스리는 손을 들어 보였다   수로왕의 골짜기엔 해마다 젊은 꽃들이 가지를 벋어 봉우리마다 마을이 들어선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소리의 근원을 채워가기 위해 밤낮의 길이를 처마 끝에 새겨두고 맨발의 새벽나루를 저어간다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강보에 싸여 오늘도 이웃집 담장 너머로 줄기를 낸다 아이들은 단잠에 귀가..

점(點) 외 1편/ 이정현

점點 외 1편      이정현   나를 위한 면적이 필요하다고 애원했지만 꿈쩍 않던 그가  디큐브아트세터 10분 거리의 위치에서 먹고 자게 하더니만  점 · 점 · 점들이 방출할 때의 숨소리를 읽으라 하였다  역의 출구마다 쏟아지는 점들의 아우성,  눈알보다 바쁘게, 마치 거리의 화면을 꽉 채운 비가  대사를 외듯  움직임이 언어보다 빠르다  나  나  나  점  점  점  오고 감이 없다는 말 집어 전디고  들숨으로 멈춤 한 채, 그에게 따지려니   그가 사람들 틈에서 졸고 있다. 점인 채로  움직임이 요란타    선문답식 시작노트 :  암두巖頭 이르시길  '물物을 물리침이 상上이 되고, 물物을 좇음이 하下가 된다' 하시기에.     -전문(p. 10-11)       ---------    살생   ..

비결/ 이정현

비결     이정현    꽃 같은 나이에  선방에 앉아 있으려니  등 뒤에서 누가 바닥을 톡톡 친다     차 한잔하러 오시게  졸다가 놀라 얼른 스님의 뒤를 따르니      내가 요즘 통 잠을 못 이루는데, 자는 비결이 뭔가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     그냥 앉아 있었다고?   찻잎이 웃는다       선문답식 노트: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고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집 모든 시의 끝에는 위에서처럼 "산문답식 노트"가 달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 노트'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시작 노트와 달리 본문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본문의 영역을 더욱 확장..

거기 외 1편/ 동길산

거기 외 1편      동길산    나무에서 멀어진 잎은 어디에 닿나  새에서 멀어진 소리는 어디에 닿나  보이는 데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데도 아닌 거기  젖었다가 마른 손의 물기는 어디로 가나  젖었다가 마른 마음의 물기는 어디로 가나  아예 모르지는 않지만  안다고도 할 수 없는 거기  가 본 곳과 가 보지 않은 곳은 늘 많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늘 많아도  누군들 가 본 곳만 갔으랴  누군들 보이는 것만 봤으랴  바람 세차게 불다가 누그러진 둑길  둑 너머로 밀려간 바람은 어디에 닿나  어디에 닿아서  마음의 젖은 물기를 말리나  둑 너머로 밀려간 물은 어디에 닿나  어디에 닿아서  젖었다가 마른 마음을 다시 적시나      -전문(p. 28)      ----------------..

삼한사온/ 동길산

삼한사온      동길산    사흘은 춥고 나흘은 따뜻한  삼한사온  삼한의 끝날이 며칠째 이어지고  오늘 또 이어진다  외투의 단추를 있는 대로 채우고  미끄러질지도 모를 영하의 바깥 나선다  삼한사온이란 말이 처음 나오던 그 옛날에도  별반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추운 날이 길기도 했으련만  안 좋은 날보다 좋은 날을 하루 더 늘린  사람의 삼한사온  추운 날이 아무리 길더라도  삼한의 끝날은 기어이 오고  추운 날보다 하루는 더 긴  한겨울 삼한사온      -전문-    시인의 산문> 한 문장: 집 안팎이 훤한 건 달빛 덕분이다. 오늘은 보름 무렵. 정확하게 헤아리진 않았지만 며칠 전이 음력 열흘이었으니 보름이거나 하루 앞뒤다. 보름이나 하루 앞뒤는 달이 가장 둥글어지려고 하거나 가장 둥글거나 가..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버들가지 외 1편      이병초    혼자일수록 술 담배 끊고  이마를 차게 하자고  지난겨울 구들장을 지었다  때론 일주일 넘게 누구와 말을 한 기억이 없어  말의 씨가 말랐는가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따옥따옥 따오기를 부르다 보면,  올겨울도 별일 없냐고  옻닭 국물처럼 구수한 목소리들이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고장 난 기억회로 같았다   두어 차례 송이눈을 받아먹으며  날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2023년 1월 9일, 같은 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파면당한 동료들은 어찌 지낼까  학교 주소를 삐뚤빼뚤 적으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며  말의 씨가 말랐을까  잠을 청하는 게 두려웠을까  고장 난 기억회로를 못 벗고  춘분을 맞고 말았는데   복직 소식은 없어도  제비꽃은 보자고 시냇가에 나오..

버스/ 이병초

버스     이병초    본관동 앞 농성 천막 곁으로  마을 버스가 삼십 분 간격으로 들어왔다가  학생들을 태우고 떠났다  나는 엔진 소리만 듣고도 시간을 짐작한다는 듯  천막 기둥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그러다 빵빵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면   "동료들 해고시키겠다는 구조조정 안에  과반수 가까운 동료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2017년 2월 13일이었다  문득 중국 단편영화 가 생각났다  내 숨소리를 똘똘 뭉쳐 검처럼  뽑고 깊었던 걸까  밤늦도록 베갯잇이 달빛에 빛났다"라고   2년 전 일기장에 써 놓은 글씨가 천막에 어른거렸다  동료라고 믿었던 그들의 시간은 알 수 없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천막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시간대입니다. 이 시차時差는 너무나 커 보입니다. 학생..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전봇대에게 전해 듣는 말 외 1편      이규자    수레바퀴처럼 늘어선 국화 다발 속  조문객이 꽃길을 내고 있다   태극기 휘장 고이 덮고  아버지는 96세 일기로 영면하셨다  장기 전투 승리로 이끈 역전의 장수將帥처럼  한 세기 전투 마치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 건너셨다   엄마는 혼잣말로  사람 팔자는 관뚜껑 열어봐야 알 수 있다 했다  이승에서 자식들과 마지막 인사 나누고  관 모서리 이해되는 어머니의 말   "칠 남매 자식 앞세우지 않고  배웅해 주는 아내도 있으니  젊은 날 목숨 바쳐 나라에 충성했고  자식들 모자람 없이 키웠으니  이만하면 됐소, 암 됐고말고"   젊은 날, 자랑 같아  전봇대에 대고 귀엣말로 속삭였다는 엄마  금실 좋았던 남편 별 탈 없는 자식 자랑 들으면 ..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낙타로 은유하는 밤      이규자    하늘길  닿을 듯 말 듯   사막 건너온 늙은 낙타  모래 위에 무릎 꺾고 누워 있다  눈꺼풀조차 무거운 듯 실눈 겨우 뜨고  새끼 발소리에 귀 세우고 있다   낙타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  잠깐 머무는 사람의 온기  너무 아쉽고 목말라   혹여 잠든 새 떠날까 봐  잠들지도 못한다   누워 있어도 힘이 센 엄마  딸자식 발목을 묶어 놓았는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다   오늘도  하늘에서 보낸 청첩 마다하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낙타     -전문-    해설> 한 문장: "낙타의 등처럼 구부러진 엄마/ 참 먼 길 오셨다"는 고백이 눈물겹다. 엄마는 오늘 하룻밤 잠깐 머무는 자식의 온기가 "너무 아쉽고 목"마른 모양인데 혹시 "잠든 새"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