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053

눈물/ 문화빈

눈물 문화빈 꼭 껴안아주세요 동요 가득한 입술에 일렁이던 파도 나는 당신을 일그러지게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친 열망 달콤하고 모호했던 화학작용 시원한 눈매, 아름다운 턱 선이 밑면에 닿는다 맥주 거품처럼 무서운 속도로 허물어지는 당신, 보이지 않는 이마를 잡는다 하얀 거품이 내 몸속으로 침투된다 나는 모든 하루로부터 소외된다 -전문(p. 137)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상흔(傷痕)/ 나채형

상흔傷痕 나채형 기생 논개제가 있던 음력 9월 9일 외삼촌댁 워리가 생을 마쳤다 그날 한 사춘기 소녀의 왼팔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열다섯 어린 소녀는 마당에 걸린 불구덩 화덕 옆에 셋째 동생과 막내 동생이 쪼그려 앉아있는 헛것이 보여 조바심 들었다. 행주를 든 양손은 용광로를 들고 정지 문턱을 넘어서 바닥에 놓는 순간 얇은 먼지 합판에 걸려 넘어졌다. 앗! 뜨거워! 비명과 함께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걷어 올린 나일론 옷소매 시뻘건 기름덩이 살가죽은 훌러덩 벗겨지고 일그러졌다 찢어지는 절규의 비명에 뛰어나온 집주인아주머니 품에 털썩 안겨 시집 못 가면 어떡해요? 悲嘆의 눈물을 흘린 철부지 "괜찮아 시집 갈 수 있어 오늘 니가 쎠댔구만!"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장..

마라톤/ 김충래

마라톤 김충래 창공에 큰 고래 한 마리 날고 뱃고동 축포처럼 울리면 오색 갈매기 일제히 공중부양 환호성이다 청어, 고등어, 꽁치 떼 지어 파도타기 하며 썰물처럼 빠지면 아직은 준치랴 우기며 휩쓸린다 줄지어, 무리 지어 순행과 역행을 즐기다 홀로 파도와 맞선다 가끔 물 위로 솟구쳐 거칠게 찬물 내뿜는다 향고래 먹은 청어 웃으며 들어오고 만세 부르며 고등어 골인하고 상어한테 지느러미 공격당한 꽁치 절룩거리며 결승선 통과한다 밀물이 되어 밀려온다 썩지 않는 준치 되려 나아간 그 세월에 꼬리지느러미가 잡힌 채 휘청거리며 들어온다 살아있다는 것은 가끔 자기 몸을 꼬리로 한번 세워보는 것이다 그래도 준치는 눈동자에 고래 한 마리 키우며 먼 곳 바라본다 -전문(p. 117) --------------- * 군산시인포..

폭우 3/ 김차영

폭우 3 김차영 늦깎이 시인이 되어 비애 가득한 모난 돌의 상처를 언어로 씻어 광을 내자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애주가인 친구에게 책을 건네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우리 친구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술을 쏟아낸다 열이 뻗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육두문자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친구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술로 퍼부어댄다 자기 술처럼 술술술 퍼붓는 친구가 참, 훌륭한 사람이네 -전문(p. 10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종이시계/ 이서란

종이시계 이서란 꽃이 핀 자리에 시간이 맺혔다 어떤 시간은 히말라야산 핑크 소금 빛 같은 노을로 피기도 한다 피는 것들은 쉽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켜보는 눈동자가 촉촉하기 때문이리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는 시간은 시계에 의존하는 명사名詞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끊임없이 초침의 페달을 밟고 밟아야 닿는 기억 가을이 오면 흰꽃나도샤프란은 선회하는 날개로 온다 젊은 날의 격동과 혼돈 삶의 애환과 살아 숨 쉬는 욕망이 싱싱한 꽃잎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정복해야 한다 시간의 집 앞에서 날갯짓으로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눌러지지 않는 돌아가는 길을 어디에다 두고 온 것인지 시간이 핀 자리에는 색이 바랜 꽃잎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문(p. 84-85)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

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미당 묘소에서 윤명규 초입의 말라비틀어진 고샅길 가파르게 구불텅거리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억새들만 봉분 위로 쟁쟁했다 고개 숙인 엉겅퀴들 주홍 글씨로 속절없이 피어나 여기저기 숙명처럼 널브러져 있는가 따뤄 올린 술잔 속에 그의 아린 춤 그림자가 덩실덩실 흐느끼고 있다 첩첩으로 쌓인 세월의 더께 독침 세운 저 엉겅퀴는 언제 자기꽃 피워낼까 장수강 물바람이 상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동천冬天을 읊조린다 -전문(p. 7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

대패를 밀며/ 문화빈

대패를 밀며 문화빈 나는 아버지 염전이 내키지 않는다 바닷물을 가두면 나 자신도 갇혀야 한다 비옥한 햇볕은 질기다 촘촘한 햇볕의 눈치를 살피다가 장악되고, 과잉되다, 쓰러진다 그러다 바다를 방치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건 무기력한 정차역 들이닥치는 뙤약볕 상큼을 모르는 땀방울 나는 대패를 밀며 휘적휘적 걸었다 퀴퀴 묵은 생이 발효될 때까지 길은 점점 잔인해지고 있었다 -전문(p. 6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무심(無心)/ 나채형

무심無心 나채형 엉큼성큼 무심無心 울퉁불퉁 비윗덩이 허황한 창고 무모한 사고 망상이 살고 있는 섬 붓 한 자루에서 세상이 풀려나오던 위리안치의 어두운 밤 저기 수선화 한 포기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 -전문(p. 5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파도의 걸음/ 김충래

파도의 걸음 김충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걷다 보면 깨알 같은 글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모래사장에 닿는다 가볍게 흰 등짐을 내려놓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시 일어서서 모래 속을 걷는다 떨림으로 자지러지기도 하도 가늘게 우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때때로 만나는 썩은 웅덩이 발이 흐느낀다 파고와 싸우며 무작정 걸어온 생 멀리 갈수록 가까이 있는 듯 아리송한데 뒤돌아보아도 발자국은 없다 -전문(p. 56)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충래/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 미네르바문학회 & 군산문협 회원

버려진 닻/ 김차영

버려진 닻 김차영 갯벌 속에 처박혀 녹슬어가는 뿌리 외로움을 힘껏 움켜쥐고 있다 저 뿌리에 매달려 몸피를 키워 잎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았던 것들 썰물처럼 바다로 갔다 한데로만 떠도는 뿌리를 잊어버린, 아니 잃어버린 것들 망둥어처럼 바다에 가득하다 시나브로 뻘 속에 묻혀가며 눈은 수평선 위 고깃배를 따라가는데 그리움 더욱 붉어지는 버려진 닻 -전문(p. 5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