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5 11

광어/ 이서란

광어 이서란 해녀의 집 앞에서는 성산 일출봉이 대왕고래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태양의 그물에 걸린 바다를 바라보며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일까를 생각했다 일출봉에 걸린 멍게와 소라 문어에 목을 맨 어머니 줄줄이 엮어지는 것들 살아서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삶 살아있는 것들의 유통기한을 바다는 쇄빙선처럼 부수고 있었다 고기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대왕고래인 양 엎드려 실려 온 날 어머니는 납작해져 꽃물을 흘렸다 몇 날 며칠 속을 다 비워내 조개껍데기같이 가벼워진 어머니 이어도사나 노래 박자에 맞춰 칼질하며 회를 떴다 비린내를 뒤집어쓰고 물질하는 어머니의 몸에 어느덧 비늘이 눌어붙어 있었다 햇빛의 궤적에 따라 바다의 바닥까지 누비며 어머니는 바다를 내재율로 품고 있다 나는 물질하는 어머니의 유통..

팥빛 파도/ 윤명규

팥빛 파도 윤명규 입천장에서 울음을 내려 본 적이 없다 꼬불꼬불 물 주름 사이로 양철 대문 삐걱거리듯 갯새들 목울대 세우며 햇살 비벼대고 그 찢긴 쇳소리 섬산 종아리에 쌓여 시장통 욕지거리처럼 서성인다 하늘이 옷을 벗고 뛰어들던 곳 별과 달은 저들끼리 속살 훤히 내보이도록 놀다 간 그곳 나 지금 미친 바람의 폭력으로 시린 몸 한 다발씩 허물어져 내리지만 출생의 비밀을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서해의 눈 다리가 없는 파도 수장되듯 몸 담그고 있는 립스틱 지워진 노을의 추한 입술 퍽퍽 가슴을 치며 피울음 운다 -전문(p. 38-3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누군가 슬피 울고 있다 창밖에서 누군가 숨어서 울고 있다 우는 것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숨을 토하듯 울음을 토해내야 한다고 너는 말했다 제때 울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무엇을 시작해도 정해진 것처럼 내리막길만 걷는다 영업 중, 임대합니다, 라는 팻말을 동시에 내건 가게 어떤 결단은 칼로 자르듯 단호할 수가 없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표정 아이의 표정도 애매할 때가 있다는 걸 아이일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몸이 사라진 체셔고양이의 웃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길들, 모퉁이들 무논에 개구리들이 떼지어 울고 그 울음 끝을 먼 산의 올빼미가 따라 운다 우는 것들의 힘으로 초목이 자란다 -전문(p. 205-206) ---------..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입을 닫고 있을 때와 입을 열었을 때는 얼마나 다른지 인식과 판단을 오가면서 두려움과 사랑을 오가면서 인식을 죽이고 다시 판단을 죽이면서 흑백의 진공 총천연색의 어지러움 무수한 살해 속에 비로소 살아나는 숲 여전히 무언가 썩어가고 있을 테지만 내가 거기 묻힐 수도 있을 테지만 거기서 무섭고 슬픈 비밀을 노래하는 작은 새들 거기서 솟아나는 기름지고 향기로운 풀 -전문(p. 188)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정한아/ 경남 울산 출생,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어른스런 입맞춤』『울프 노트』, 시산문집『왼손의 투쟁』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명실상부 명불허전 명실공히 유명무실 자타공인 명약관화 나는 박순원이다 실명도 필명도 예금주도 박순원이다 주민등록상으로도 호적상으로도 박순원이다 친구들은 나를 수너니 수너니 수너나 수너나 부른다 박순원 박수넌은 무엇과 어울릴까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어떻게 쓰일까 박순원 씨 박순원 님 박순원 귀하 박순원 대리 박순원 과장 부장 박순원 사장님 박순원 대표 박순원 선생님 박순원 작 박순원 곡 박순원 해설 박순원 감독 음악 박순원 음향 편집 박순원 행인3 박순원 박순원의원 박순원부동산 수너니논술학원 (주)박순원 (사)박순원 박순원재단 박순원뼈해장국 우거지등뼈해장국 박순원갈비탕 박순원족발 박순원생식 박순원 만세 박순원의 봄 박순원과 아이들 박순원의 시간 박순원 시대 수너니..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왜 그렇다잖아 사람이 말야 사람이 죽기 전에 말야 사람이 죽기 몇 분 전에 말야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한다잖아 낱낱이 되산다잖아 주마등처럼 내달리는 등불처럼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몰라 바로 지금이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그 찰나인지도 몰라 그래서 몇 십 년 전 일이 아까만 같고 시방 피고 있는 저 목련이 이미 오래전에 지던 그 목련만 싶고 그래서 금방 지나고도 영영 그리워지고 내내 서운해지고 그래서 그래서인 거야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피고 지는 목련 아래 아내 손을 맨 처음인 듯 꼬옥 쥐는 까닭은 -전문(p. 175)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채상우/ 경북 영주 출생, 2003년『시..

비등(飛騰) 5/ 최승철

비등飛騰 5 최승철 '컷쇼*' 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직장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과 절박감 비가 내리자 향초처럼 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혼 후 많은 것을 잃었다 행복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꿈속에서 당신의 알몸을 매만지면 무엇인가 생각이 날 것만 같아 허둥대다 깨어 방금 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엔 정말 소중한 기억이 생각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꿈이 아니었다 어느 아침 나는 온전치 못한 혼자다 -전문(p. 173-174) * 톱날을 밀고 당기는 전동 톱의 일종. 보통 건설현장에서는 '컷쇼'라고 부르는데 영어식 표현은 reciprocating-saw이다.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최승철/ 전북 남원 출생, 2002년『작가세계..

토월천/ 배한봉

토월천 참새 배한봉 잠시 찬 바람 잦아들고 비닐 조각처럼 햇볕이 걸린 천변 난간에 예닐곱 참새가 앉아 짹짹거리고 있다. 몸 숨길 마른 풀도 없고 식량이 될 벌레나 알곡도 없고 둥지 틀 처마 밑이나 흙담 구멍도 없는 하천 바닥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천변 난간으로 날아올라 앉아 저들끼리 뭐라뭐라 토론하고 있다. 할아버지 참새들이 여기서 모래 목욕 즐겼다더라고 옛이야기 재잘대는지 모른다. 종족들과 이사 오려 했는데 혹한기에 낭패라고 한탄하는지 모른다. 뭔지 할 말 남았다고 짹짹거리다 조그맣고 까만 부리 닦던 비닐 조각 같은 햇볕을 놓치고는 황급히 날아오르는 참새들. -전문 (p. 166)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

바다 풍경/ 이경아

바다 풍경 이경아 흐르는 것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라 노래하는 것들은 내일을 노래하게 하고 고이는 것들은 별처럼 가라앉게 하라 장밋빛 목선을 고즈넉이 저어가며 어부는 바다에 그물을 깊이 던지고 별을 건져 올려 바람 따라 갯내를 실어 나르네 놀란 파도 흰 거품 물고 젖은 머리채를 흔들어도 생사生死 넘나들 깃발을 펄럭이는 한 폭의 바다 풍경 눈에 밟힌 목선이 오래도록 바다를 어지럽게 붙들고 있네 -전문(p. 3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이경아/ 1965년 수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 위에 뜨는 바람』『내 안의 풀댓잎 소리』『오래된 풍경』『시간은 회전을 꿈꾸지 않는다』『겨울 숲에 들다』『지우개가 없는 나는..

천수호_사랑과 하나인 자의식(발췌)/ 그늘을 만드는 시간 : 이규리

그늘을 만드는 시간 이규리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