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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서정은 이 시대의 우회로이다/ 박동억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 말은 곧 인간의 법정이다. (p. 11) * 휴머니즘의 회복을 주장하는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라도 "휴머니즘의 파괴는 결코 진보가 아니라는 것이다."1) 무엇보다 그는 인공지능 개발은 효율적인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한 기업들의 자본에 기대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공지능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대어 모든 것을 자본화하는 데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과정에서 야기될 것은 인간의 도구화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인공지능의 미래 또한 자명하다. 누구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시 쓰는 '노동'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시 쓰기는 인간 존재의 고차적인 능력을 증명하지 않게 될 것이고, 시 작품은 대..

한 줄 노트 2024.04.07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사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힜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얼굴을 때리고 싶은 상황을 설명하고 그럼에..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

늦은 눈 외 1편/ 이광소

늦은 눈 외 1편 다산초당에서 이광소 쫓긴 듯 내려온 곳 강진 도암 땅에 한 자字 두 자字 눈이 내리네 어제도 기다리고 오늘도 기다리는 마음 알았다는 듯 한 줄 두 줄 눈이 내리네 늦어서 급히 서둘렀다는 듯 지붕에도 나뭇가지에도 다섯 줄 여섯 줄 내리네 반가워서 뜰에 나가 손을 흔드니 그래, 알았다는 듯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내리네 기쁜 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새로운 소식 기다렸던 다산도 이렇게 들뜬 마음이었을까 살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눈물이 앞을 가려 뒤뜰 연지못으로 돌아가 보니 밤새 몰래 내린 두꺼운 얼음책이 있네 녹지 않은 소식은 얼마나 달콤한지 비바림 속을 견뎌온 정든 나무들은 다산 유배되어 있을 때 경소리 들은 듯 야윈 가지 초당을 향해 굽어 있네 시린 겨울밤 내내 목민심서를 쓰던 ..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이광소 안과병원 수술실에서 레이저 불빛을 바라본다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세 개의 행성이 덮쳐오고 있다 내 유년 시절의 회전목마를 불태우고 내 청년 시절 독서실을 불태우며 내 전 생애를 달리던 도로의 가로수들을 불태우는 동안 의사는 수정체를 빼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한다 아, 사라진 내 눈의 고유성 만약에 관절마저 인공관절로 대체한다면 심장마저 인공심장으로 대체한다면 항문마저 인공항문으로 대체한다면 나는 안드로이드가 되는 것일까 아직도 보이는 세계에 대한 미련이 강해 백내장 수술실에 누워 있지만 언제쯤 눈을 감고서도 보이지 않은 세계를 볼 수 있을까 눈은 있지만 정신맹이 있듯이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고 살아온 생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은 어둠 속으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