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에 남은 나의 시 19

兵士 예찬/ 정숙자

兵士 예찬 정숙자/ 육군 충용부대 군인가족 새벽 두 시 장거리 행군에서 돌아온 병사의 함성 예서 들리네. 소년에서 남성으로 바꿈하는 앳되고 의젓한 함성의 울림 우렁찬 음악보다 더 우렁차고 새벽빛보다 더 장엄하도다. 부모 형제 고운 누이 사랑스런 소녀도 조국 수호의 길에는 한길에 비켜섰으니. 험한 산맥 총격의 훈련도 그들을 위해 배우노라 그들을 위하여 견디노라. 장미보다 진한 정열로 병사들 이곳에 모이었으니 그대들 땀으로 이 나라는 영원하리라. 태양처럼, 태양처럼 솟아오르리라. -전문, (전우신문 제5378호 1982. 7. 16(금). 7면. ------------------ * 정숙자/ 등단 이전. 1982년 충북 음성, 부대 옆 관사에 살 때, 이로부터 6년 후: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함.

가거도/ 정숙자

가거도 정숙자 one: 서 있어서 섬이겠지요. 파도에 폭풍우에도 끄떡없이 서 있어서 섬이겠지요. 천 날 만 날 물을 먹고도 흐무러지기는커녕 직각으로 서 있어서 섬이겠지요. two: 바다가 제아무리 깊다고 한들 섬보다야 깊을 수 없죠. 섬의 뿌리는 바다 바닥에서 시작인 걸요. 게다가 섬의 뿌리는 지금도 자라고 있죠. 섬의 뿌리는 옆으로 사선으로도 뻗어 먼 섬들과 교신도 하죠. 태풍의 눈쯤이야 미리미리 알 수 있고요. 물 더미를 깨트리는 섬의 능력은 하루 이틀에 익힌 재주 아니죠. three: (그녀는 스킨스쿠버) 뭐 좀 물어볼까? 멋진 섬 좀 알려 줄래? 제일로 멋진 섬 하나만 알려 줄래? four: (가거도? '사람이 거할 만하다'는 뜻?!) 버스 한 대가 비탈진 둘레를·······바람 많이 불고 바다 ..

군단 창설 제38주년 기념 축시/ 정숙자

군단 창설 제38주년 기념 축시 정숙자 그대 나이 서른여덟이라기 내 마음에 서른여덟 개 촛불 밝히었네 7천만 우리 겨레 가운데 어느 한 사람 3 · 8이란 숫자 가슴에 못 박히지 아니했으랴 부모님 시신을 묻지도 못한 채 월남 길에 올랐던 소년이 지천명을 넘긴 오늘에 이르기까지 6군단이여, 그대는 중부전선 왕방산 기슭을 통일 염원으로 지켜왔구나 강 건너 떠나보낸 아들 딸 그리워 부모의 영혼인들 밤 새워 울지 아니했으랴 독일 · 구소련보다도 3 · 8선 저쪽 우리의 부모형제가 더 빨리 자유를 찾았어야 했을 것을 그러나 6군단이여 그대 나이 서른여덟 되도록 일순간도 잠자지 않고 바친 애국 일념이 독일 · 구소련에 먼저 가 닿았음이라 나는 믿었네 이제 우리 차례 3 · 8선의 또 다른 이름 휴전선은 종전이 아닌..

춘추전국시대/ 정숙자

춘추전국시대 정숙자 넘겨도, 넘겨도 나오지 않는 게 있다 무엇이 빠져 밍밍한 걸까 스무 권 서른 권··· 백 권을 펼쳐도 보이지 않는다 번쩍 찔리는 거 풍덩 빠뜨리는 거 찰싹 갈기는 거 쿵쿵쿵 스며드는 거 쨍그랑 정수리 까부수는 거 그런 거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거, 그 좋은 거 언제 다 해치웠단 말인가 왜 이렇게 목숨 건 진검眞劍이 안 보인단 말인가 언제 이렇게 다들 영웅이 되었단 말인가 명쾌한 사유, 진지한 인식, 서늘한 해학, 향긋한 일갈 푸른 끓는 둥근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왜 이렇게 다들 시를 잘 쓴단 말인가 -전문, 『문학과창작』 2012. 봄호 ---------------------- * 삶과 꿈의 앤솔러지 『좋은시 2013』(311쪽)/ 2013. 1. 31 펴냄 * 정숙자/ 195..

좌우명/ 정숙자

좌우명 정숙자 차 잎사귀 하나 커피 한 알갱이 넣지 않고 맑은 물 끓여 마시고 싶은 날 있다 향 맛 색깔도 없는 씹을 것 녹일 것도 없는 맹물, 따끈히 마시고 싶은 증후군 때때로 높다 새로 1시 45분, 지금 밖에는 눈이 쌓인다 우주의 숨결 탓일까 술도 차도 국물도 아닌 맹물, 맹하니 마시는 이 밤 물의 뼈 우려낸 ‘맑고 따뜻하게’가 맑고 따뜻하게 핏줄로 뇌로 전방위로 꽂힌다 물렁물렁 맹물 되는 법 눈 끔벅이는 법 맹물, 마시며 솎는다 다듬는다 맹물 대낄이!! -전문, 『정신과표현』 2009. 3-4월호 ---------------------- * 삶과 꿈의 앤솔러지 『좋은시 2010』(257쪽)/ 2010. 2. 15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한국시..

무저항주의자의 날개/ 정숙자

무저항주의자의 날개 정숙자 중심을 향할수록 중심에서 멀어진다 구겨지고 찢기고 밀려난다 숨소리 급한 물방울 하나 절벽으로 튀어오른다 뭘까 까닭이 도대체 샛강으로 냇물로 비척거린 발 해저지도海底地圖 한 컷도 없이 물어물어 수정궁 찾고자 했던 그 집요가 죄가 됐을까 꿈틀꿈틀 바다 가득 흩어지는 관절이 붉다 체세포 살아있는 물방울 하나 하늘에 박힌 얼룩점 하나 극점에 이르러서야 클로즈업 클로즈업 줌인 줌인 천수천안관세음 구백구십구 번째 손과 구백구십구 번째 눈이 켜켜 어둠을 건드렸을까 홀로 자란 고요가 고독감 넘기는 아침 하마터면 나, 고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라고 여길 뻔했네 -전문, 『문학마당』 2008-겨울호 ---------------------- * 삶과 꿈의 앤솔러지 『좋은시 2009』(269쪽)..

정지비행/ 정숙자

정지비행 정숙자 풀어질까 떨어질까 비뚤어질까 이미 꿴 단추에도 손이 간다 덜렁대는 단추는 다시 달고 빠지려는 단추는 다시 채우고 탈 없는 단추는 여전히 무사한가 어루만진다 차례차례 단춧구멍엔 온갖 바람 드나든다 청춘이 가고 사랑이 오고 행복도 잠시 꽂힌다 변절과 배신 실망과 낙담 그보다 더 무서운 고독도 위풍당당 쳐들어온다 전전반측 날밤도 많다 하루하루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굽이굽이 기기묘묘 단춧구멍이다 한 개 잘못 채우면 다른 단추까지 틀린다기에 첫 단추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단추도 첫 단추다, 여기려 한다 저쪽 단추 이쪽으로 옮겨놓는 일 그게 곧 생활이다 삶이란 다만 그거다 기대했던 숙달도 뾰족한 태양도 없이 낄낄낄 새 단추가 생겨날 따름 죽음이라는 단춧구멍이 내 머리통 기다릴 따름 -..

김용직/ 정숙자

김용직 -아와로키테슈와라 정숙자 옷깃을 여미고 이 편지를 씁니다. 1994년 1월. 단시집 『감성채집기』해설을 써 주십사고 찾아 뵈었을 때 선생님께선 "원고를 본 후 결정하겠다." 단호하셨지요. 「대본」("개구리 꽈리 부는 모내기철엔/ 농부들 연등처럼 못줄에 피네")이라는 그 한 편이 있어, 결국 쓰시겠다 했지만 대부분의 시를 "고쳐라" 못 박으셨지요. 오로지 전통주의자였던 제게 현대시는 너무도 딱딱했습니다. 도무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왜 시를 그토록 비틀어야 하는지 까닭도 모른 채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괴기법怪技法의 정체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론서들을 읽으며 선생님의 강의를 청강하러 다닐 때, 마흔세 살이나 후린 제가 학부 학생들 틈에 군학일계君鶴一鷄로 끼었을 때, 청력이 약하..

서정주/ 정숙자

서정주 -어디 뭐라고 정숙자 선생님, 저는 어제 단시를 하나 지었어요 그래 뭐라고 썼지? 제목이 숙명인데요 이슬에 관한 내용이에요 외울 수 있으면 외워 봐 나무들 손끝으로 받는 이슬을 풀잎은 몸 굽혀 허리로 받네, 예요 어디 뭐라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외워 봐 나무들~ 손끝으로 받는 이슬을~ 풀잎은 몸 굽혀 허리로 받네~ 그는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길게 풀어 보냈다 그리고는 "나는 육십 년 동안 시를 썼어도 이슬 한 방울의 무게를 달아볼 생각은 못했어. 시는 누가 쓰든지 잘 쓰는 게 문제지 꼭 내가 써야만 되는 건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그 한마디는 내 문학인생에 주춧돌이 되었다 그날, 따라주신 맥주와 부라보! 웃음소리도 바위틈 난초로 뿌리내렸다 -전문,『문학나무』2008-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