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11

마라톤/ 김충래

마라톤 김충래 창공에 큰 고래 한 마리 날고 뱃고동 축포처럼 울리면 오색 갈매기 일제히 공중부양 환호성이다 청어, 고등어, 꽁치 떼 지어 파도타기 하며 썰물처럼 빠지면 아직은 준치랴 우기며 휩쓸린다 줄지어, 무리 지어 순행과 역행을 즐기다 홀로 파도와 맞선다 가끔 물 위로 솟구쳐 거칠게 찬물 내뿜는다 향고래 먹은 청어 웃으며 들어오고 만세 부르며 고등어 골인하고 상어한테 지느러미 공격당한 꽁치 절룩거리며 결승선 통과한다 밀물이 되어 밀려온다 썩지 않는 준치 되려 나아간 그 세월에 꼬리지느러미가 잡힌 채 휘청거리며 들어온다 살아있다는 것은 가끔 자기 몸을 꼬리로 한번 세워보는 것이다 그래도 준치는 눈동자에 고래 한 마리 키우며 먼 곳 바라본다 -전문(p. 117) --------------- * 군산시인포..

폭우 3/ 김차영

폭우 3 김차영 늦깎이 시인이 되어 비애 가득한 모난 돌의 상처를 언어로 씻어 광을 내자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애주가인 친구에게 책을 건네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우리 친구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술을 쏟아낸다 열이 뻗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육두문자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친구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술로 퍼부어댄다 자기 술처럼 술술술 퍼붓는 친구가 참, 훌륭한 사람이네 -전문(p. 102)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김원길_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부분)/ 무언재운 : 지촌 김방걸

무언재운無言齋韻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 1623-1695, 72세) 一臥蒼江歲月深(일와창강세월심) 강촌에 돌아온 지 몇 해이러뇨 幽居不受點塵侵(유거불수점진침) 숨어 사니 한 점 티끌 묻어오지 않네 已知漁釣還多事(이지어조환다사) 고기잡이 낚시질도 번거로웁고 更覺琴碁亦攪心(갱각금기역교심) 거문고며 바둑두기도 심란하구나 石榻任他風過掃(석탑임타풍과소) 앉아 쉬던 바윗돌은 바람이 쓸게 두고 梅壇輸與鳥來吟(매단수여조래음) 화단도 돌보잖아 새가 와서 우짖네 如今全省經營力(여금전생경영력) 이제금 해 오던 일 모두 접고서 終日無言對碧岑(종일무언대벽잠)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보네 - 전문, 김원길 譯 ▶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발췌)_ 김원길/ 시인 나의 13대 조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선생의 시, 무언재운無言..

고전시가 2024.04.21

혼자 먹는 점심/ 사공정숙

혼자 먹는 점심 사공정숙 평일 낮 시간에 아들과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휴가를 받아 회사를 쉬는 아들과 얼굴을 맞대고 식탁에 앉았으니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한가로이 식사를 즐기는 가운데 문득 아들이 물었다. "엄마, 평소에는 점심을 어떻게 드시죠? 혼자서 드셔야겠네." 새삼스럽게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걱정을 해주었다. 철이 들었을까. 아들은 혼자서 밥을 먹는 엄마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다가 누군가가 제 머리통을 통 하고 칠 때의 자극을 받은 양 아주 일상적인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린 것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혼자서 밥을 먹으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모른다고 하였다. 아들은 그런 제 엄마가 가여운지 친구들이나 가까이 사는 이모라도 불러서 같이 식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

에세이 한 편 2024.04.21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이끼 묵묵한 부도탑 지나 대나무 숲을 헤치면 새벽종성 보라 빛 푸른 그늘 실개울 비스듬히 구름 위의 처마 끝 버들치 가볍게 받쳐 든 채 하루 종일 불어오는 풍경소리 너럭바위에서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 간혹 계명암의 닭소리를 듣기도 했다 오월 눈부신 햇살은 눈물처럼 흘러 고여 골짜기 굽이 돌 때마다 발은 땅에 닿지 않고 늘 간당간당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달빛 그림자에 가슴 베이는 나날 주렁주렁 등꽃마다 불을 밝히고 초파일 밤을 지샐 때 홀로 듣는 바람의 살들 잊혀진 생각처럼 향수해香水海 어스름 닻을 내리면 삼배 마치고 일어서는 걸어다니는 절寺 한 채 수천 수만 삼매의 뿌리 더욱 질기다 -전문(p. 144-145) * 등운곡騰雲谷: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국가 지정 문화재 ---------..

직박구리/ 박옥수

직박구리 박옥수 해저처럼 가라앉은 연말 하얀 눈발 내리던 그날 털실뭉치처럼 동그래한 배와 긴 꼬리를 가진 텃새가 갈고리 발로 베란다 난간을 휘감고 있다 무슨 연유로 내게 왔을까 시선은 늘 창가에 박혀있다 엄마의 혼령인 듯 잿빛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눈과 마주친다 경계를 넘어선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딸이 마음에 안 놓이는지 유리창너머로 내 맘을 꿰뚫으며 안부를 물어온다 엄마는 피난지에서 나를 낳고 삼일을 굶어 네게 빈 젖을 물렸다는 무수한 옛 이야기 달달한 걸 좋아했기에 찐 고구마를 잘라 창밖에 내어 놓는다 양식을 얻으려 새의 옷을 입고 우는 아우성인지 이제 마음이 놓여선지 식솔 하나를 달고 드나든다 새가 날아간 하얀 불곡산 너머로 내 눈길이 따라 간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산봉우리마다 고봉밥이..

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콩코르드' 광장 나무도 풀도 뛰어나와 박수치고 은하의 별들도 반짝 반짝 웃음을 보태주었다 서른아홉 살 손끝에서 쓸려나가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른 그들을 싹싹 쓸어버리는 그 눈빛에 두 손 번쩍 들고 꼬꾸라지는 카리스마는 국경을 넘는 바람이 배달하고 있다 깨진 밥그릇을 수리하고 휘어진 척추를 수리하고 햇볕과 에어컨을 불러와 땀과 냉기가 핏줄을 타고 함께 돌아가라고 등을 다독이며 가지런히 추켜들고 찰랑찰랑 차오른 무논에다 다시 심고 있다 뽕나무밭을 움켜쥐고 훌훌 털어낼 때 매달린 벌레들이 두 손을 비비는데 시들었던 뽕나무밭이 새파랗게 살아나고 있다 뽀얗게 흙먼지 뒤집어쓰고 길바닥에 뒹굴던 돌들이 바퀴 굴리며 달려 나오는데 지금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그들의 날개는..

말모이/ 이현실

말모이 이현실 을지로 3가 뒷골목 얽히고설킨 전깃줄 아래 하늘이 손수건만큼 보이는 골목 2층 삐걱대는 나무계단 위에 K씨의 말모이 공장이 있다 온종일 탈탈탈 폐지 실어 나르는 이륜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와 40년 함께 늙어가는 활자들 노안으로 흐려진 자판 위에 머리통만 한 볼록렌즈 바싹 들이대어 문장의 어긋난 뼈를 집어내고 가지런히 가다듬기도 하지 안구 건조증으로 침침한 눈 인공눈물 짜 넣으면서도 까끌까끌 모래알 같은 글자들 흩어진 말을 한자리에 모으지 모래바람 능선을 넘으면서 말들의 발자국을 그러모으는 낙타 한 마리 오늘도 구부정한 노구로 한 권의 책을 짓기 위해 닥나무 숲, 말모이 공장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전문(p. 160-161) *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시작노트> 인간의 삶을 바..

눈 온 날 아침/ 문근영

눈 온 날 아침 문근영 하얀 도화지에 발바닥 도장을 찍는다 닭은 새싹 도장 오리는 잎사귀 도장 강아지는 꽃 도장 세상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눈에게 참 잘했다고 제각기 칭찬 도장 꾹꾹 찍는다 -전문(p. 84)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문근영/ 201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동시집『연못 유치원』『앗! 이럴 수가』『두루마리 화장지』『깔깔깔 말놀이 동시』외 공저 다수

동시 2024.04.2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창조 창작 자연 예술 태양 등불 태양도 때로는 눈물에 휠까? 피가 끓기도 할까? (1990. 10. 4.) ‘싶은’ 그것이 사라졌다. 더 갖고 싶은, 더 맺고 싶은, 더- 더- ‘더’가 ᄉᆞᄅᆞ졌다. 이런 게 정화인가? 승화인가? 순화인가? (요즘 빈번히 체감하는 악 중 악) (그로 인한 효과일까?) 소박한 말씨와 웃음들이 미래형으로 안착한다. 각인은 공간을 겸한 시간까지도 거기 고정시킨다. -전문(p. 67) ------------- * 『미래시학』 2024-봄(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