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8 4

바다/ 강우식

바다 강우식 1 바다 곁에 오면 시끄러운 세상사 파도에게 도거리 줘 말끔히 밀어내고 싶다 바다 곁에 오면 갑자기 율리시즈처럼 배 밑창이 울리도록 가슴을 쾅쾅 치고 싶다 2 바다에 한번 빠지면 그 심연의 밑바닥까지 간다 그 심연의 세상은 너무 어둡고 캄캄하다 절망의 외침보다 더 크고 묵중한 침묵이 있다 경험한다는 거 배운다는 거 안다는 치 너무 하찮다 물이 커서 놀기 좋고 뜨기 좋다고 하지만 그 죄여 오는 압력을 어이 감당하랴 발버둥질 친다는 거 자체가 꿈속의 행동 같다 모든 것이 항공모함 같은 육중한 문이면서 모든 것이 문이 없는 첩첩산중과 같은 감옥이다 인간은 그런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3 생맥주 잔 만한 내 머리가 바다 쪽으로 기운다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 담긴다 젊은 날에는 가슴에 ..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환자들은 의사에게 한번 잡히면 죽어서야 풀려난다.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내과는 일 년 걸쳐 1번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서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그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5,6년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언 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감격해 아내 이름을 부르며 비..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주마간산走馬看山 강우식 1. 주마간산은 세월 속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흐르는 파노라마다. 어사화御賜花를 꽂지는 않았지만 말 타고 달리며 산천경개를 대충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겠느냐. 흐르면서 지나치면서 그냥 무심한 듯 본 산이 무위자연으로 있어 부끄러움이 없고 나그네 행색이라도 눈썰미가 있어 산자락을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모실 묫자리로 안성맞춤으로 점찍어 염두에 두었나니. 그냥 바쁘게 무심히 본 것인데 무욕이 되어 삭여서는 마침내는 티를 거른 욕심이 되었다. 저 산을 사서 부모님 묘로 쓰려면 아무래도 수중에 푼돈이라도 챙겨야겠기에 주마가편走馬加鞭하며 하루를 내딛는다. 2. 고향에는 어머니만 계신 게 아니라 오래도록 떨어져 살은 내 짝도 있다. 그런 정을 과거에 묻고 떠돌았다. 날품팔이 같은 인생..

바다 2/ 박두진

바다 2 박두진 바다가 와락 달려든다. 내가 앉은 모래 위에······ 가슴으로, 벅찬 가슴으로 되어 달려오는, 푸른 바다! 바다는, 내게로 오는 바다는, 와락 와락 거센 숨결, 날 데릴러 어디서 오나! 귀가 열려, 머언 바다에서 오는 소리에 자꾸만, 내, 귀가 열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며, 푸른 물 위로 걸어가고 싶다. 쩔벙 쩔벙 머언 바다 위로 걸어가고 싶다. 햇볕 함빡 받고, 푸른 물 위를 밟으며 오는 당신의 바닷길······ 바닷길을 나도, 푸른 바다를 밟으며 나도, 먼, 당신이 오는 길로 걸어 가고 싶다. - 전문(p. 10-11) * 블로그 註/ 참고 문헌: 韓國現代文學大系 20 『朴 斗 鎭』 (1983, 지식산업사. 49-50쪽)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