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4

대패를 밀며/ 문화빈

대패를 밀며 문화빈 나는 아버지 염전이 내키지 않는다 바닷물을 가두면 나 자신도 갇혀야 한다 비옥한 햇볕은 질기다 촘촘한 햇볕의 눈치를 살피다가 장악되고, 과잉되다, 쓰러진다 그러다 바다를 방치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건 무기력한 정차역 들이닥치는 뙤약볕 상큼을 모르는 땀방울 나는 대패를 밀며 휘적휘적 걸었다 퀴퀴 묵은 생이 발효될 때까지 길은 점점 잔인해지고 있었다 -전문(p. 63)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무심(無心)/ 나채형

무심無心 나채형 엉큼성큼 무심無心 울퉁불퉁 비윗덩이 허황한 창고 무모한 사고 망상이 살고 있는 섬 붓 한 자루에서 세상이 풀려나오던 위리안치의 어두운 밤 저기 수선화 한 포기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 -전문(p. 59) --------------- * 군산시인포럼 제3집 『시, 바다와 썸 타다』 에서/ 2023. 12. 26. 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마음 머는 소리 외 1편 정수자 이화우 좀 보자는데 살이 선뜩 떨려서 몸살약 뒤져보다 빈 약갑을 구기고 널뛰는 잎샘 꽃샘을 갑인 양 흘겨주다 뉘보다 깊이 정든 스마트 체위라고 위문이나 주문할까 폰을 들고 엎드리다 속 모를 흰소리 판에 속이 외려 시린 날 무람없는 톡이며 인증샷 팍팍 지우다 지음이란 너마저! 버리고 돌아서니 꽃 적실 수작酬酌도 없이 마음 머는 소리만 -전문(p. 65) ----------- 호적 결국은 보가 터진 개발지의 형제 필지 호적까지 들먹거린 명절 끝이 파묘라니 그나마 헌 집도 헐고 찬 우물도 꾹 메우고 그런 한때 흘리고 간 대못 같은 뼈 한 편이 선산에 달 좋다고 호적胡笛 찾아 부는지 놓아둔 눈물 고르듯 은하수도 파르라니 -전문(p. 70) ----------------------..

사족/ 정수자

사족 정수자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 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 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 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 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 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전문(p. 24) 해설> 한 문장: 3 · 4조 혹은 4 · 4조가 거의 그대로 지켜지는 이 작품은 바로 그 오래 익숙한 가락 때문에 읽는 순간 이미 절반은 읽는 자의 피부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육화된 가락'이라고 하면 정확할 이 소리는 적어도 한국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겐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에 '사우다드Saudade'라 불리는 포르투갈 고유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시조의 가락엔 한국어 공동체의 오래된 공유 정서가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