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검지 정숙자 2024. 4. 5. 00:32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명덕상회 짐자전거는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전거였다

  석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연탄이나 쌀자루를 싣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그란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자랐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온 동네 아낙들의

  왁자한 웃음이 몰려가

  천장에 매달린 삼십 촉 백열들이 상점을 지키는 밤이면

  아버지는 방바닥에 사탕을 늘어놓고

  어린 딸에게 산수를 가르쳤다

  가끔은 물감 향 번지는 스케치북 속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힘센 짐자전거가 때론 울기도 한다는 비밀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한번 녹이 나기 시작한 체인은 자꾸만 궤도를 거부하고

  바람의 소리로 일구어낸 집 문패 밑에서

  빠르게 부식되어 갔다

 

  사시사철 땀을 굴리는 아버지는

  연등 같은 꽃상여에 눕고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고물장수 리어카에 실려 쩔그렁거리는

  풍경 속으로 떠났다

 

  단발머리 교복 위로 단풍비가 내리던 날

  자전거 페달을 밟으시던

  내 스케치북 속의 아버지가

  무지개 바퀴를 굴리며 구름 너머 노을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전문(p.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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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호 <신작 소시집> 에서

  * 유정남/ 2018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일요일의 화가 8요일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