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
안희연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 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전문, 『당근밭 걷기』(문학동네, 2024)
▶ 불빛(발췌)_김현/ 시인
내게도 돌 모양의 초가 있다. 성동혁 시인에게 선물 받았다. 빛의 교회를 설계한 안도 다다오 미술관에서 구매했다는 현무암 모양의 초. 그 초는 검은 상자에 들어 있었고 동혁은 그 상자에 연필로 편지를 적어 주었다. 초에 불을 붙이면 타닥타닥 자연의 소리가 들릴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동혁의 시'라고 여겼다. 같은 제목으로 나도 시를 한 편 적어야지 싶었다.
돌과 초에 힘입어 희연도 그랬을 것이다. 돌을 초와 연결하고 종이와 글로, 사랑으로, 깊은 슬픔으로 침잠하는 시를 보면서 이건 또 희연만이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언젠가 희연이 들려준 습작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음에 '집시'가 살던 시절이라고 했다. 누구에겐들 그런 시절이 없겠는가. 그 시절 희연이 쓰는 시에는 제 안의 불길에 휩싸여 남이 불을 지르지 않아도 스스로 불타는 이의 춤사위가 그러니까 죽음에의 염원이 그득했다고 했다. 그런 얘길 하며 희연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희연의 시가 불타는 중이라 생각한다. 시뻘겋게 일렁이는 불길이 아니라 하얗게 타고 남은 불. 재가 아니라. 울부짖음이 아니라 들썩이는 어깨가 아니라 소요 후에 잔존하는 숨결 그리고 가슴의 오르내림. 나를 파괴하려는 모양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려는 모양으로 그 불은 종이 위에 굳어 있다. (p. 시135-137/ 론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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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4-9월(417)호 <커버스토리> 에서
* 안희연/ 시인,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당근밭 걷기』등
* 김현/ 시인, 2009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글로리홀』『입술을 열면』『호시절』『낮의 해변에서 혼자』『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장송행진곡』등, 소설집『고스트 듀엣』, 산문집『어른이라는 뜻밖의 일』『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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