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의자는 의자를 보고 있다 의자는 의자를 보는 의자를 외면한다 의자는 등받이가 없다 의자는 의자의 등받이를 내주었다 등이 없어진 의자 등이 있는 의자에 앉는다 의자를 보던 의자 의자를 외면한 의자 그 의자는 무엇으로부터 왔을까 -전문(p. 43)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김도은/ 2015년 웹진『시인광장』으로 등단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24.09.10
주영중_이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발췌)/ 밤의 벌레들 : 황유원 밤의 벌레들 황유원 불을 켜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이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이 담겨 있던 어둠은 얼마나 아늑하고 그윽한 것이었겠습니까?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사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하며 자,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은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우아하게 이 욕실 바닥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겠습니까? 그 바닥에 자신들을 해할 것은 아무래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세상 편안한 마음으로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불을 켜자마자 갑자기 없던 혼이라도 생겼다 빠져나간 듯 그렇게 급..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9.09
땅에서 하늘로/ 최영화 땅에서 하늘로 최영화 어릴 때 방에서 타고 마당에서 타던 세발자전거 아이들 자라자 천덕꾸러기 되어 처마 아래 구석진 곳 주차장이다 색 바래 남루한 몰골 세 바퀴 바람 가득 안고 옛 친구 만나 달리고 싶고 같이 지내고 싶다고 소리친다 버리려 대문 밖 들고 나가니 내리막 삐걱거리며 우는 바퀴 아이들 웃음소리 들리는 듯 까까거 까꺼거 크르릉 나무 사이 긴 장대 묶고 동아줄로 그네 걸었다 신나게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땅에서 하늘로 바뀐 빈 마당 -전문(p. 34)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최영화/ 2017년『문예춘추』 & 2022년 『상징학연구소』로 등단, 시집『처용의 수염』『..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24.09.08
바다 로또/ 임성화 바다 로또 임성화 조간신문 사회면에 고래가 나타났다 물길을 잘못 들어 그물코에 걸린 걸까 몸 곳곳 작살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면에 옷음 띠고 지폐 헤는 늙은 어부 벼락을 맞기보다 더 힘들다 하는데 조상이 돌봤나 보다 일확천금 누렸으니 어젯밤 엄마 고래 새끼 울음 들었을까 고향길 거친 물살 길 잃어 더듬다가 반구대 조상들 서책 읽기 전에 눈감은 -전문(p. 29)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임성화/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아버지의 바다』『겨울 염전』, 동시조집『뻥튀기 뻥야』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24.09.08
무첨(無添)/ 박산하 무첨無添 박산하 물봉골, 산정호수 숱한 발자국에도 수면은 구겨지지 않고 물길은 골목으로 이어져 흐르고 흰옷 입은 호수 주인 친정 상이 났다며, 기어이 사진을 찍지 않는 가을이 호수에 담기고 호수가 만든 도토리 묵향, 접시에 담기어 손님을 맞는다 백 번을 참는 호수와 욕될 수 없다는 호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물길 아직도 단정하게 흐르는 돌담장 쪽문 누마루가 호수에 비치고 저 아랫동네 어디쯤엔 은행나무 하나가 속을 다 내어 주고 껍질로 산다던데 -전문(p. 26)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박산하/ 2014년『서정과 현실』로 등단, 시집『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아.. 사화집에서 읽은 시 2024.09.08
문학의 힘을 믿다(전문)/ 김미옥 문학의 힘을 믿다(전문) 김미옥/ 문예비평가 『서동시집(West-ostlicher Divan』은 괴테의 유일한 단행본 시집이다. 괴테는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의 『디반(Divan)』 시집을 읽고 영감을 받아 시를 썼다. 작품은 동방의 시인들과 노년의 괴테가 사랑했던 여인 마리안네에 대한 찬사와 사랑이 주축을 이루며 페르시아의 시 형식인 가젤의 운율을 독일어로 재현했다. 하이네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인사"다. (p. 201~ ) 작품은 초판본에 12개의 시편만 수록되었다가 후에 「유고 중에서」가 추가되었다. 동방의 시인에 대한 찬사와 연인에게 바치는 연가는 생물학적인 나이를 초월하는 괴테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지인에게 말한 창작 의도다. "서양과 동양, .. 여러 파트의 글 2024.09.08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괘종시계 : 백무산 괘종시계 백무산 키 큰 괘종시계 하나 길게 추를 빼물고 낡은 사무실 벽에 말뚝처럼 걸려 있다 이곳에서 다방을 열었던 옛 주인이 두고 간 거라는데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고 있다 석탄난로와 함께 뜨거웠을 저 시계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지만 한때는 미인의 얼굴처럼 숨 멎는 시선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다방은 읍내에서 처음 네온사인을 밝혔을 것이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닭이 울고 해가 걸리던 쪽을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시계는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시..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9.07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 허만하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하만하 느닷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는 가벼워진 잎사귀들은 무리 지어 광활한 가을의 품 안에서 흩어지는 바람의 허전함이 된다. 황갈색 가랑잎들은 멋대로 썰렁한 하늘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곡률대로 휘어지는 비탈 면 따라 움직이는 정확한 기하학적 질서다. 멀리 하늘 끝 지긋이 노려보며, 나는 저물녘이 서서히 농도를 찾아, 내 몸 안에 피처럼 번지는 것을 느끼며, 내 몸을 떠나 빈 하늘 끝 헤치고 싶은 내 손바닥 한 자의 비어 있는 무게를 펼쳐본다. 어느덧 나의 실체는 두 팔 치켜들고 겨울 사상 중심에 서서 광물처럼 황량해지고 있는, 잎 진 한 그루 나무 회초리 끝 명석한 바람소리였다. -전문 『시사사』, 2024-봄(117)호 ▶..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9.07
부엉이가 운다 외 1편/ 황길엽 부엉이가 운다 외 1편 황길엽 왁자지껄 소란했던 웃음소리 어디에 머물렀는지시골집 마루에 앉으니 부엉이가 운다흐르는 시간은 조그도 굴하지 않고구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산 그림자 휘어져 내려온다 조금씩 쌓여가는 땅거미가 내려앉아나는 마당 가득 드러누운 그림자 지우고밤을 기다린다 길고양이 한 마리 현관 앞에 앉아저녁밥을 기다리는 손님 같다나에게 남아있는 빵 두 조각한참을 망설이다 내 입을 닫아버리고고양이에게 정중히 대접하고 하늘을 본다 참 예쁜 밤이지만바람만 배회하는 쓸쓸한 시간나도 부엉이처럼 울고 있어시골풍경이 더욱 시린 밤이다 아카시아 향이 마당 가득 들어와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엄마의 사랑당신 없는 빈집, 얼룩진 벽에 걸린흑백사진 속 내 유년을 웃고 있다 -전문(p. 40-41) ------.. 시집에서 읽은 시 2024.09.07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세상 향한 바쁜 걸음들이 또 하루살이로 허물어지는 날푸른 숲은 숲대로 눈부신데 펜 끝은 무디어집니다 생은 까마득하게 걸어왔던 길에서 한 뼘쯤으로 접혀져오는 거리로 멈춥니다 열정과 욕망이 뜨거웠던 삶의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수십만 번을 오르고 내리는 발걸음만 보다가 웃자라버린 시간, 하얗게 바래진 병실에는 기억 속에 머무를 오늘을 밀고 갑니다 가끔씩 몰아쉬는 마지막 숨소리가 무겁게 창문에 매달려영혼은 거리를 좁히고 가볍게 등 뒤에서 차마 내려놓지못한 초점 잃은 눈동자에는 세상 인연들 하나하나 담으려다 풀어집니다 공기처럼 가벼이 또 한 사람이 떠나고,남아 있는 흔적 털어내며 병실을 비워내는 것은 슬픔이 커지는 마지막 시간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도 호스피스 병실에.. 시집에서 읽은 시 2024.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