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0 3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멀어지면서 저무는 뒷모습  밤의 해변은  멀거나 가깝고   수평선에 넋을 놓다가 파도 한 줄  노을빛으로 울먹이다가 파도 한 움큼  새벽 바다 어선의 불빛에게도 파도 한 자락   밀려오고 쓸려가는 무한반복의 굴굽이가  무너지고 멈춰 설 때  비로소 홀로임을 깨닫는 모래알들   제본되지 않는 모래의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닭 뼈다귀 개뼈다귀 사람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텅 빈 모래밭에서  희고 검은 돌멩이의 시계판 위에서  발끝에서 물밑에서   물결은 겹쳐져서 출렁이지만  제각각의 찰나 속으로 사라진다   폭죽이 솟는다 허공에서 꽃피는 불꽃의 아우성  캄캄하게 메아리치는 겹겹의 구멍들  저 상처를 어찌하랴 싶지만  밤의 해변은  끝없이   널빤지와 신발짝과 폐타이..

허구의 힘 외 1편/ 장수라

허구의 힘 외 1편     장수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어요   대자연을 마주하면 외르르 무너지는 것들   너무 버티고 살았구나   많이 답답했구나   너무 억누르고 살았구나   무슨 말인지도 알겠고 어떤 마음인지도 알겠어요   석양을 가슴에 담으며 내 목소리를 내가   자신 있게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걸   현재 자신과 어긋난 시간의 흔적을   허구인 줄 알면서도 죽어라 믿는 힘   그것이 절망을 준다면   또 다른 환상을 만들 수 있는 힘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믿고 또 믿는 것    -전문(p. 100..

시접/ 장수라

시접      장수라    끝내는 방식은 모두 슬프다  몸을 바꿀 수가 없어서  옷 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   봄비 때문이 아니었다  you're magic이라 써진 봄을 입고  횡단보도를 웃으며 뛰어가는 긴 머리 아가씨  벚꽃 한 송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그 웃음에서 운명을 꿈꾸었던 시간을 보았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  변수를 예감할 때 누구나   조금씩 시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분의 천 조각을 내어 수선해 보아도  겨드랑이 옆구리 사타구니 우리 몸 구석구석  곡선의 결을 따라 다른 온도로 숨어 있는 마음들  변수를 둔 상태는 불투명하다   시접을 모두 써 버려 감당할 여백이 없을 땐  자신을 통째 버리거나 품을 떠나보낸다  몸에 맞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