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3 4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까지만 내려온다밤새 눈물범벅을 만든 사내를 만나러비구니가비구니를 버리려고 겨울 산길을 내려오다가산바람 소리를 듣는다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읍내 다방으로 가려다허옇게 잎끝이 마른 산죽山竹 덤불에 웅크린 고라니의 말간 눈빛과 마주친다발목이 부러져 인가에도 기웃거리지 못하고인중이 갈라진 코를 벌름거리며 우는 고라니 때문에비구니는 코앞에 닥친 간이 정류장을 연신 바라만 본다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됐어마음에 솟는 붉은 정념을 짙은 회색의 승복으로 가린 그대여 사내는 공연히 차를 식히며 식어가는 차의 일생을 내려다보며자신에게 오고 있을 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센다  햇살이 비낀 다방 유리창에 날아가는 새 그림자 기척에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놓치고 얼마쯤 다시 센다이만하..

돌 앞으로/ 정영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 한쪽에 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부르기 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 않았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하나의 장소가 필요..

김정현_순수한 분노의 잔여적 미래(발췌)/ 신의 미래▼ : 최백규

신의 미래▼      최백규    이제 네가 신이 되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눕혀진 나를 내려다보며 전해주었다   나무로 되어 조용히 망가진 교실에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럽게 울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죽으면 다 끝이라고 반복했다   열린 창을 통해 온몸에 빛이 쏟아지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듯 바람이 가벼웠다   신은 왜 나에게 신을 주었을까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소년을 바닷가에서 수습하듯이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의 몸 위로 수많은 꽃이 쌓이고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미래를 마주하고 온 것처럼  살가운 눈물로   더 이상 막아야 할 슬픔..

종일/ 권민경

종일     권민경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멈췄다   너는 지물포 집 사내아이  2학년 4반  맨 앞에 앉아 있고  피부가 검다   너를 더듬고  빚어보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날씨들이 흘러간다 흘러   둑을 터뜨리고 마을을 집어삼킨다  똥물에서 헤엄쳐 피난 가거나  옥상에서 수건을 흔들 때  우리는 수재민이라 불린다   그거 어쩐지 사람 이름 같아  킬킬거리다 하늘이 밝아온다  뉴스 속보는 흘러가는데   영원히 아홉 살에 멈춰 있는   너의 죽음을 검색하면  고양군이 나온다  고양군은 고양군으로 멈춰져 있다  고양시가 나타나도 소용없는 일   야산은 어느 산의 이름일까  동명이인은 왜 이렇게 많을까  수재민의 아이들도  수재민  아이들이 구호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