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7 4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괘종시계 : 백무산

괘종시계      백무산    키 큰 괘종시계 하나 길게 추를 빼물고  낡은 사무실 벽에 말뚝처럼 걸려 있다   이곳에서 다방을 열었던 옛 주인이 두고 간 거라는데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고 있다   석탄난로와 함께 뜨거웠을 저 시계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지만 한때는  미인의 얼굴처럼 숨 멎는 시선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다방은 읍내에서 처음 네온사인을 밝혔을 것이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닭이 울고 해가 걸리던 쪽을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시계는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시..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 허만하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하만하    느닷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는    가벼워진 잎사귀들은  무리 지어 광활한 가을의 품 안에서 흩어지는 바람의 허전함이 된다.   황갈색 가랑잎들은 멋대로 썰렁한 하늘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곡률대로 휘어지는 비탈 면 따라 움직이는 정확한 기하학적 질서다.   멀리 하늘 끝 지긋이 노려보며, 나는 저물녘이 서서히 농도를 찾아, 내 몸 안에 피처럼 번지는 것을 느끼며,  내 몸을 떠나 빈 하늘 끝 헤치고 싶은 내 손바닥 한 자의 비어 있는 무게를 펼쳐본다.   어느덧 나의 실체는 두 팔 치켜들고 겨울 사상 중심에 서서 광물처럼 황량해지고 있는, 잎 진 한 그루 나무 회초리 끝 명석한 바람소리였다.     -전문 『시사사』, 2024-봄(117)호   ▶..

부엉이가 운다 외 1편/ 황길엽

부엉이가 운다 외 1편    황길엽  왁자지껄 소란했던 웃음소리 어디에 머물렀는지시골집 마루에 앉으니 부엉이가 운다흐르는 시간은 조그도 굴하지 않고구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산 그림자 휘어져 내려온다  조금씩 쌓여가는 땅거미가 내려앉아나는 마당 가득 드러누운 그림자 지우고밤을 기다린다 길고양이 한 마리 현관 앞에 앉아저녁밥을 기다리는 손님 같다나에게 남아있는 빵 두 조각한참을 망설이다 내 입을 닫아버리고고양이에게 정중히 대접하고 하늘을 본다 참 예쁜 밤이지만바람만 배회하는 쓸쓸한 시간나도 부엉이처럼 울고 있어시골풍경이 더욱 시린 밤이다 아카시아 향이 마당 가득 들어와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엄마의 사랑당신 없는 빈집, 얼룩진 벽에 걸린흑백사진 속 내 유년을 웃고 있다   -전문(p. 40-41)   ------..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세상 향한 바쁜 걸음들이 또 하루살이로 허물어지는 날푸른 숲은 숲대로 눈부신데 펜 끝은 무디어집니다 생은 까마득하게 걸어왔던 길에서 한 뼘쯤으로 접혀져오는 거리로 멈춥니다 열정과 욕망이 뜨거웠던 삶의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수십만 번을 오르고 내리는 발걸음만 보다가 웃자라버린 시간, 하얗게 바래진 병실에는 기억 속에 머무를 오늘을 밀고 갑니다   가끔씩 몰아쉬는 마지막 숨소리가 무겁게 창문에 매달려영혼은 거리를 좁히고 가볍게 등 뒤에서 차마 내려놓지못한 초점 잃은 눈동자에는 세상 인연들 하나하나 담으려다 풀어집니다 공기처럼 가벼이 또 한 사람이 떠나고,남아 있는 흔적 털어내며 병실을 비워내는 것은 슬픔이 커지는 마지막 시간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도 호스피스 병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