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2 4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머그 컵?   휴지통 앞에서 말이 꺾인다   브도블록 한 장쯤, 기울어진 머그잔에 스트로 꽂아 넣자  뭉그러지는 속엣말 몇 모금   와글시끌, 끌려오는 발바닥 조각들  가로세로들, 콜라주   나 왜 휴지통 앞에 서 있지?         *   얼굴 따윈 필요 없어, 뒤통수를 반쯤 기울여 보면 알아  숨은 것들이란 가장자리 쪽으로 기울거든   머그 컵을 뒤집는다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음 엎어지고  소프라노, 어제 죽은 여배우의 대사 비스듬히 선다   공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너와 난 어깨를 들썩였잖아, 어슷 햇살이 잘려 나가는 찰나였어   라운드 미드나잇 흐르고  피카소 달리 에른스트 마그리트, 지나가고  머릿속에 엉겨드는 토끼 여우, 이건 뭐! 짐승도 아니..

이찬_"지평선의 아름다움"(발췌)/ 사령(死靈) : 김수영

사령死靈     김수영(1921-1968, 47세)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전문-   ▶"지평선"의 아름다움_ 『中庸』으로 김수영 읽기(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

오리온성운/ 김숲

오리온성운      김숲    하늘에서 상상이 반짝인다 컴퓨터 화면 속에 펼쳐진 성운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다 나는 벌처럼 1,300광년 떨어진 오리온성운으로 날아간다 상상력을 오리온성운만큼 키우다가 불타는 혜성처럼 잘게 부서트리기도, 빛을 산란시켜 지구의 저녁노을을 펼쳐 놓기도 한다 젊은 별들로 이루어진 트리페지움 성단에서 푸르게 빛나는 상상. 나의 청춘이 그 성단에서 빛나고 있다 신의 입김인 가스와 먼지구름 속에서 태어나는 어린 별들을 보기도, 프로토톡래넷 디스크 원시행성 원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말머리성운의 어두운 실루엣으로 들어가 히힝 울기도, 수억 광년 펼쳐진 우주 속을 달리다 말발굽을 오메가 성단에 놓고 왔네 수많은 상상을 조합해 만든, 아니 나의 삶 같은 초신성..

우화/ 윤유점

우화     윤유점    온 동네 소란하게  달 보고 짖던 견공  들창에 솟아오른  슈퍼문에 소원 빈다   삼킬 듯 돌연한 마음  취기 오른 행복감   끝없이 찬양하는   눈동자 번뜩이고  가면 쓴 얼굴들이  군림하는 붉은 세상   밤사이, 마법에 걸려든  성스러운 팽나무  싸늘하게 죽어 간다     -전문(p. 67)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윤유점/ 2007년『문학예술』로 & 2018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인생의 바이블코드』『귀 기울이다』『붉은 윤곽』『살아남은 슬픔을 보았다』『영양실조 걸린 비너스는 화려하다』『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마그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