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89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구광렬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구광렬    뿌리의 무사無事를 위해 그루터기를 살피면 삐쭉 마른 가지 위에 앉았던 이방의 텃새들 후루룩 천장 위로 오르고 밤새 잡풀들 침대 난간을 감아 종교재판을 받는 조수의 손금 같은 잎맥들을 발트해의 칙칙한 늪지대로부터 걷어 올려야먄 한다   비가 빗금을 그으며 내릴 땐 처마가 짧은 내 작은 방에선 침대 모서리를 옮겨도 도굴을 당한 듯한 머릿속이 흥건히 젖어 와 동전을 뎐져 앞뒤를 가리고픈 날엔 그 카드 벨 같은 콜록거림, 대기원 속살을 비집고 멀리 고향 어느 별자리쯔음 쨍해 주길 바란다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꺼질 듯 말 듯 개척교회 십자가가 바랜 셔츠 아래 문신으로 찍히던 날, 보았다 넝쿨 끝에 핀 꽃불 하나,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돌아오..

박선옥_생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를 찾아가다(발췌)/ 자작시 : 미켈란젤로

자작시     미켈란젤로(1475-1564, 89세)    큰 대리석의 부름이 마음을 쉽게 끌고 갔다.  돌 하나에 팔이 나오고, 돌 하나에 다리가 나와  밤 늦게까지 미켈란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그건 돌이 아니라 단단한 살점이었다.  금방 산에서 데려온 돌들은 미켈란의 망치질에 잘 순응했다.  불꽃을 튀겨내면서 자신의 살점을 떨어내주는 대리석  오래된 돌일수록 마음을 사로잡아 야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사람의 늘어나는 주름만큼 돌도 사람을 닮아가는 육신,  그것은 이미 예비된 사람의 환생인 것이다.     -전문-    ▶생가生家, 카프레세 미켈란젤로를 찾아가다(발췌) _박선옥/ 시인  미켈란은 신장 결석이 따라다녔다. 돌가루는 그의 입을 통해 결석으로 뭉쳐지는 고통을 주었다. 아욱 뿌리, 아욱 ..

외국시 2024.09.0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2      정숙자      당신은 깊은 ᄉᆞᆫ 메아리처럼 저자에 나오지 아니합니다. 제 발목엔 무엇이 채여 당신께 날아갈 수 없는 걸까요. 스스로 짚은 게 ᄋᆞ닌… 영문도 모르는 수형受刑에 갇혀… 그리움만이 몸을 놔두고 바람에 섞였습니다. (1991. 1. 16.)               외로울 때 읽어야 진짜책이지 푸른 먹물이걸러낸볕뉘 그걸 먹고 입고 거닐며접때도 오늘도 남은 파도도   -전문- --------------* 웹진 『시인광장』 2024-9월(185)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2/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2      정숙자      당신은 깊은 ᄉᆞᆫ 메아리처럼 저자에 나오지 아니합니다. 제 발목엔 무엇이 채여 당신께 날아갈 수 없는 걸까요. 스스로 짚은 게 ᄋᆞ닌… 영문도 모르는 수형受刑에 갇혀… 그리움만이 몸을 놔두고 바람에 섞였습니다. (1991. 1. 16.)                 외로울 때 읽어야 진짜 책이지  푸른 먹물이 걸러낸 볕뉘  그걸 먹고 입고 거닐며 접때도 오늘도 남은 파도도   -전문-  -------------- * 웹진 『시인광장』 2024-9월(185)호*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등

예술가의 서재_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이장욱(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부분)        이장욱/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소설이지만 마음공부를 위한 실전 사례집 같은 책이다. 불교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철학이 융합된 소설은 싯다르타(고타마 싯다르타와 다름)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싯다르타는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집안인 크샤트리아 계급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바라문의 아들이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모든 이에게 기쁨을 주던 그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한다. 그의 자애로운 아버지는 그토록 아끼던 아들이 자신을 떠난다는 슬픈 소식에 괴로웠지만 결국 하룻밤 만에 그의 결정을 허락한다. 아버지를 등지고 구도자의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는 그 이후..

신상조_불안(발췌)/ 고요야 까마귀야 : 정우영

고요야 까마귀야      정우영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집과 길, 여기와 저기의 분별을 지웠다. 풍경들은 다만 새하얗고 펑퍼짐한 경계선을 그릴 뿐, 그 무엇도 딴소리를 내지 않는다.   말라비틀어진 장미도 얽혀 있는 전깃줄도 추위에 떨던 허기도 다 단란하게 가라앉아 고요라는 한 음절로 차분하다. 날카로운 작설雀舌조차 착실하게 평화롭고,   그러니 까마귀야, 철없는 바람아.  네 눈과 귀가 함께  보고 들은 풍문*은 정녕코 묻어놓아라.   천연天緣을 앓다 어느 날 갑자기 우두둑,  지구가 통째로 뒤집힌다고 해도.     -전문-    * 최근 3년 동안의 풍문 아닌 풍문을 살짝 털어놓을까. 2021년에는 중동 지역의 사막에 폭설이 쏟아졌고 독일 라인강은 백년 만에 대홍수를 일으켰으며, 2022년에는 ..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우람한 근육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젊디젊은 후배 형사들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당신이 35년 근무에 마침표를 찍는 날,  아! 당신도 저리 늠름했었는데  그때는 동생들도 많이 거느렸었는데  지금은 마중 나온 후배 하나 없고  상관의 전화 한 통 없군요  삼십 대 후반에 두 번 수술한 뇌종양이 다시 도져서  3차 수술을 한 당신을  등 떠밀어 내보내는 날,  좁은 경찰서 뒷마당으로 초조하게 드나드는 범죄자의 가족들,  그들이 졸아붙어 애원하는 그 방 앞에서 우리도  퇴직 서류에 도장 찍는 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타국으로 나가고  딸은 사는 일이 여전히 바빠서  정복 입은 사진 한 ..

모란/ 나금숙

모란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 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 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 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 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 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소반..

생각 괴물/ 권기덕

생각 괴물      권기덕    내 머릿속엔  괴물이 살고 있어요   괴물은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달아나지 않아요   괴물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해요   괴물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 큰일나요  반대로 행동해야 해요   어쩌면 난  괴물이 공부하라고 해서 안 하고  괴물이 청소하라고 해서 안 하고  괴물이 운동하라고 해서 안 하는 거예요   어쩌면 난  괴물이 화내지 말라 해서 화내고  괴물이 까불지 말라 해서 까불고  괴물이 휴대폰 게임하지 말라 해서 한 건지도 몰라요     가끔은 괴물을 잊고  그대로  행동했는지도 몰라요     -전문(p. 135)   -------------------  *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 에서  * 권기덕/ 2009년 『서정시학』으로 시 부문 &  20..

동시 2024.09.04

망(茫)/ 채상우

茫     채상우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박혀 있고 애기별꽃은 아기별꽃대로 피어 있다 그 옆에 또 나는 나대로 앉아 있다 반나절 건너 작년처럼 재작년에도 그랬듯   비로소 찬연하구나   거기에는 전생이나 후생이 없었다    -전문(p. 80)    -------------------  *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호  에서  * 채상우/ 2003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멜랑콜리』『리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