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4 5

믿음의 증거/ 성자현

믿음의 증거      성자현    내가 믿는 대부분은 소문  얼마나 확신에 차 있으면 사자 앞에 목을 내밀 수 있나  떨기나무 가운데 빛나던 불꽃,  발을 끌며 걸어가는 밤길에서 만난다면  믿음은 더욱 단단해질까, 이 역시 소문일 뿐  먼 옛날 현자가 있어 강가에서 소리쳤다 하나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은 얄팍한 종이  내가 추종하는 것은 그 위를 기어다니는 활자  눈뜨면 소문에 소문이 더해진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무당벌레 같은 너의 외피  현란한 노래와 춤에 마음을 빼앗긴다  추측이 더 분명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끔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가설  내가 간직한 나도 모르는 비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할지라도  두려움으로 멈추게 될 발걸음  눈감으면 모두 사라질 외피들  그리고 증거들     -전문(p..

↔ (좌우화살표)/ 박정민

↔       박정민    냄새가 사라졌다, 타원의 무리를 몰고 모조리  알코올로 소독한 굴곡을 재구성하느라 36.5도 이상의 열기를 견디는 동안  입덧 바깥만 돌아다녔을 모든 익어 가는 것들의 냄새   먼저 냉장고를 열고 김치통을 열어 본다  그라인더 바닥에 깔린 원두 부스러기  하물며 변기 속 배설물도 냄새를 벗었다  커피와 보리차는 냄새 벗고 나서 서로 퉁치는 관계가 되고  새콤달콤한 향을 잃은 디퓨저는 의무를 벗었다   필통 속 볼펜들은 서로 엉킨다, 침묵을 고려 중이다  잉크 냄새 벗은 글자는 무게를 줄인 만큼 가벼워진다  입속 습관적 되새김질은 무미건조해지고  당신의 늙은 입냄새 나지 않는다  깔린 곳의 냄새, 내몰린 것의 냄새, 낮은 것의 냄새, 우울의 냄새  내게 나던 지독한 노화 냄새도 ..

속눈썹/ 황지형

속눈썹      황지형    창문을 밝힐 라고 말하자 사선으로 내린 빗물 깜빡거리고 속눈썹 떨린다 인공눈물까지 반짝인다 어깨에 뜬 별 달달하게 맺힌다 손과 무릎으로 한 봉지 촛농이 흘러내린다   수평선을 긋고 있다 이등변삼각형처럼 내부로 한 점 떨어지고 속눈썹 붙인 창문의 크기 구하는 방정식, 달고나를 붙인 보관함, 100피트의 거리 좁히자 혓바닥이 붙어 버린다   빗물이 반짝인다 누가 생일 파티를 위한 이라고 말하자 예의상 촉촉한 빛이라고 한다 달고나 작아지고 차가워지고 모형 틀에 찍혀 나오는 별들 100피트의 넓이 파먹힌 연인   눈빛에 반짝 헛디딘 발을 어루만진다 창문엔 물방울 맺혀 있고 검은 마스카라 아래 울음이 터질 듯 감긴 눈동자엔 뿌려 놓을 별이 없다 매듭진 행성 하나가 하얗게 사선을 긋는 ..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겨진 종이 위에 비 내린다  해진 물방울을 읽는다 낡은, 구성Ⅲ*?   빨강, 고양이 등 뒤로 날 선 네모 기운다 셔터를 누르려는 찰나  뷰파인더 속 실루엣, 허벅지 사이 몇 방울의 비   줄이 맞지 않는 문장으로 엽서를 쓴다  주소가 없는, 끝내 되돌아온 이름 빗물에 번진다  (반지하 쪽문에선 푸른 머리칼 냄새 컹컹거렸지)   글씨들 들뜬 물방울 속 이름 몇 널브러지고  접힌 모서리 숨은 그림, 속이 비치고  (여자일까, 난간에 기대선 저 노랑)   점이었을까? 콤마, 아니 느낌표?  책이었다 몸이었다가 바람 지나가자 나무였다가, 검은   강이 흐른다  물속에 잠긴 그림자 위로 소나기   실루엣 속의 여자 빠져나간다  젖었던 속살 바랜다 희부연 사진 속,..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별나라시인협회      윤효    2023년 10월 10일  김남조 시인 입국했을 때  별나라 시인협회 주최 환영식이 열렸다.  이어령 문학평론가의 사회 속에  유치환 회장의 환영사와  서정주, 조병화, 구상 시인의 축사가 이어졌다.  별나라 생활 안내는 정한모 시인이 맡았다.  좌중은 이미 만석이었다.  앞자리에는 특별 손님 김세중 조각가가 앉았다.  그 뒤에 나란히 청록파가 앉고, 그 옆으론 신석초, 장만영, 김현승, 김종길 시인 등이 보였다.  김춘수 시인은 연신 훌쩍이는 박용래 시인을 달래느라 시달리고  있었다.  풍류도인 박희진 시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몇 달 먼저 왔다고 오탁번, 박제천 두 시인은 벌써 적응을 마친 듯했다.  다만 김종삼 시인은 걸어오느라 조금 늦고 있었다.   주인공은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