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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조_불안(발췌)/ 고요야 까마귀야 : 정우영

고요야 까마귀야      정우영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집과 길, 여기와 저기의 분별을 지웠다. 풍경들은 다만 새하얗고 펑퍼짐한 경계선을 그릴 뿐, 그 무엇도 딴소리를 내지 않는다.   말라비틀어진 장미도 얽혀 있는 전깃줄도 추위에 떨던 허기도 다 단란하게 가라앉아 고요라는 한 음절로 차분하다. 날카로운 작설雀舌조차 착실하게 평화롭고,   그러니 까마귀야, 철없는 바람아.  네 눈과 귀가 함께  보고 들은 풍문*은 정녕코 묻어놓아라.   천연天緣을 앓다 어느 날 갑자기 우두둑,  지구가 통째로 뒤집힌다고 해도.     -전문-    * 최근 3년 동안의 풍문 아닌 풍문을 살짝 털어놓을까. 2021년에는 중동 지역의 사막에 폭설이 쏟아졌고 독일 라인강은 백년 만에 대홍수를 일으켰으며, 2022년에는 ..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우람한 근육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젊디젊은 후배 형사들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당신이 35년 근무에 마침표를 찍는 날,  아! 당신도 저리 늠름했었는데  그때는 동생들도 많이 거느렸었는데  지금은 마중 나온 후배 하나 없고  상관의 전화 한 통 없군요  삼십 대 후반에 두 번 수술한 뇌종양이 다시 도져서  3차 수술을 한 당신을  등 떠밀어 내보내는 날,  좁은 경찰서 뒷마당으로 초조하게 드나드는 범죄자의 가족들,  그들이 졸아붙어 애원하는 그 방 앞에서 우리도  퇴직 서류에 도장 찍는 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타국으로 나가고  딸은 사는 일이 여전히 바빠서  정복 입은 사진 한 ..

모란/ 나금숙

모란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 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 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 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 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 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소반..

생각 괴물/ 권기덕

생각 괴물      권기덕    내 머릿속엔  괴물이 살고 있어요   괴물은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달아나지 않아요   괴물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해요   괴물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 큰일나요  반대로 행동해야 해요   어쩌면 난  괴물이 공부하라고 해서 안 하고  괴물이 청소하라고 해서 안 하고  괴물이 운동하라고 해서 안 하는 거예요   어쩌면 난  괴물이 화내지 말라 해서 화내고  괴물이 까불지 말라 해서 까불고  괴물이 휴대폰 게임하지 말라 해서 한 건지도 몰라요     가끔은 괴물을 잊고  그대로  행동했는지도 몰라요     -전문(p. 135)   -------------------  *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 에서  * 권기덕/ 2009년 『서정시학』으로 시 부문 &  20..

동시 2024.09.04

망(茫)/ 채상우

茫     채상우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박혀 있고 애기별꽃은 아기별꽃대로 피어 있다 그 옆에 또 나는 나대로 앉아 있다 반나절 건너 작년처럼 재작년에도 그랬듯   비로소 찬연하구나   거기에는 전생이나 후생이 없었다    -전문(p. 80)    -------------------  *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호  에서  * 채상우/ 2003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멜랑콜리』『리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