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무 가시밭/ 안정옥

검지 정숙자 2024. 9. 29. 02:25

 

    나무 가시밭

 

     안정옥

 

 

  나무들은 있음으로

  제 몸이 부풀다 터지면 5월이 오고

  무성한 잎들이 그늘을 맞이하면

  사방 모든 걸 볼 수 있는 도마뱀처럼

  나무는 별 거리낌이 없다

 

  격하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바깥이다

 

  아침,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왔다

  잎을 다 내린 나무들은 어두운 가지들을

  속내처럼 들쳐 내 짐짓 그 길이 가시밭이다

 

  가시들도 견디다 못해 글자의 생김새로

  사람도 견디다 못해 중얼거림으로

  그런 반복을 거치면 적막이다

 

  누구는 생의 끝자락이 적막이라지만

 

  나무가 온 삶을 비유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제 몸을 늘려대기만 한 것을

 

  문득 눈이 녹듯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

     -전문-

 

  해설> 한문장: 화자는 이날 아침, 잎을 다 내린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왔다. "나무들은 있음"으로 존재한다는 화자의 성찰은 생을 의식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다. 나무는 제 몸을 부풀려 잎들을 틔우고 그늘을 만들고, 다시 그 잎들을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제 몸을 늘려대기만 한 것"에 완벽히 무감하다. "나무들은 별 거리낌이 없다"라거나, "격하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바깥이다"란 표현은 나무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생은 의식하는 존재에게만 생이다. 생을 의식하지 않는 존재에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문득 눈이 녹듯/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란 화자의 다짐은, 눈이 녹듯 허망하게 사라질 생을 의식하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자 경탄으로 다가온다. 격하게 흔들리면서, 혹은 격하게 미혹당하면서, 그러함에도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기에 인간은 황홀하게 절망할 수 있다. 적막은 적막이므로, 꽃도 나무도 인생도 문득, 눈이 녹듯 스러질 것이므로. (p. 시 33/ 론 85-86) <신상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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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에서/ 2024. 9. 27. <지혜> 펴냄

  * 안정옥/ 1990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나는 독을 가졌네』『웃는 산』『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 『아마도』『헤로인』『내 이름을 그대가 읽을 날』『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연애의 위대함에 대하여』『다시 돌아나올 때의 참담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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