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정원에서 문장을 찾다 외 1편/ 안정옥

검지 정숙자 2024. 9. 29. 03:16

 

    정원에서 문장을 찾다 외 1편

 

     안정옥

 

 

  정원을 손질하는 방법, 장미는 감미로운 심장 쪽에, 거들떠보지 않는 홀대나무, 너 떠난 후회나무의 늘어진 가지들 반쯤 꽃이 진, 뭉치기 전의 작은 물방울인 안개, 비가 되려는 질량 그가 찾아오기 전의 고요 무재아귀의 모든 글자들 나를 옮겨줘. 글자로 그를 수월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특별한 은의,

 

  아무리 뒤섞어 놓아도 정원의 명칭이 내 것이라 여겼다 그런 힘에 의해서 나무들은 제 그림자에 나서지도 맞서지도 못해, 나무를 살생하는, 아픔을 거치고 난 뒤에 다른 말로 옮긴 실수나무, 그 나무 중 한 그루 아래에 가끔 앉아 있던

 

  그 그늘의, 그럴 때 대비해 갖추어져야 할 예외도 있다 당신이 오기 전 쓰는 일에 힘쓰지 않았다 문장과 나의 몸가짐이 같을 때 당신 온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나는 것, 문장이다

     -전문(p. 56)

 

 

    ----------------------

    문장 구하기

 

 

  문장에 능한 사람을 뽑는 시험이 있었다니, 바람 앞에 선 우리의 왕, 공민왕 때는 더욱 공정하려 응시자의 필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곧바로 다른 사람이 답안지를 베껴 쓴 뒤 채점하는 방식까지 두었다니

 

  이순신장군도 한번 낙방, 권률장군은 46세에 합격했다 전이재난고頤齋亂藁를  지은이는 문장이 우수함에도 46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마치고 일행들과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글귀를 지금 나는 수식 없이 더듬더듬 읽어내고 있다

 

  문장만 잘 짓는다고 공정한 세상을 맞이했을까

 

  지금은 제대로 평가하는가 몇몇 상은 공정하려 애쓰는 것 알아채지 그러나 詩로 전 생애를 바친 詩人 이름을 빌려와 제 욕심을 꾹꾹 누르는 이를 나는 경계해 나와 마주했다면 잘 봐, 내 얼굴에는 공정하려 애썼던 왕의 한 줌 향기 같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거든

      -전문(p. 57)

 

  --------------

  * 시집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에서/ 2024. 9. 27. <지혜> 펴냄

  * 안정옥1990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나는 독을 가졌네』『웃는 산』『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 『아마도』『헤로인』『내 이름을 그대가 읽을 날』『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연애의 위대함에 대하여』『다시 돌아나올 때의 참담함』 등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 외 1편/ 금시아  (0) 2024.10.02
머구리 K / 금시아  (0) 2024.10.02
나무 가시밭/ 안정옥  (0) 2024.09.29
아우여, 아우여 외 1편/ 윤효  (0) 2024.09.27
시월/ 윤효  (0) 202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