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르주나 (부분, 여섯)
카를로 로벨리지음/ 이중원 감수/ 김정훈 옮김
*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들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편의에 따라 여러 사물로 나누어놓았을 뿐이죠. 산맥은 개별 산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분이라 느끼는 대로 나눈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이고, 행성은 항성 주위를 돌기 때문에 행성이고, 포식자는 먹이가 있기 때문에 포식자이고, 위치는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위치입니다. 시간조차도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p. 173-174)
* 나가르주나는 2-3세기 사람입니다. 그의 저작에는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고 해석과 주해가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 문헌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러 가지 읽기가 겹겹이 겹쳐 있어 우리가 풍부한 의미의 층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대 문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저자가 원래 말하려던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문헌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를 간단히 말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바로 양자역학과 공명을 일으킵니다. 물론 나가르주나는 양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알 수도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이 세상에 대한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제공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가 제시하는 관점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양자 세계에 대해 좀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합니다. 나가르주나가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전문용어는 '공空, Shunyata, 순야타'입니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p. 177-178)
* 우리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할 궁극적이거나 신비로운 본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광대하고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며,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주체와 의식에 대한 수백 년에 걸친 서양의 사변은 아침 공기에 닿은 서리처럼 사라져버립니다.
많은 철학과 과학이 그러하듯 나가르주나는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합니다. 즉, 관점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관습적인 외관적 현실과, 궁극적인 실재의 구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분을 뜻밖의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궁극적 실재, 본질의 부재, 공이라는 것입니다. 없다는 것이죠.
모든 형이상학이 모든 것이 의존하는 본질, 모든 것이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시작점인 제1실체를 찾는다면, 나가르주나는 궁극적 실체, 시작점은··· 없다고 말합니다.
서양철학에서도 비슷한 방향을 조심스럽게 가리키는 직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관점은 철저합니다. 그는 관습적인 일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여러 층위와 측면을 지닌 복잡한 그대로 긍정합니다. 그것은 연구되고, 탐구되고, 분석되고, 가장 기본적인 용어로 환원될 수도 있습니다. (p. 178-179)
* 나가르주나 사상의 매력은 현대 물리학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의 관점에는 어딘가 아찔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전적 철학이든 현대의 철학이든 최고의 서양 철학과 공명합니다. 흄의 급진적 회의주의와도, 잘못 제기된 질문의 가면을 벗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도 공명합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많은 철학들이 잘못된 출발점을 가정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설득력이 없게 되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는 것 것 같습니다. 그는 실재와 그것의 복잡성과 이해 가능성에 대해 이갸기하지만, 궁극적인 토대를 찾겠다는 개념적 함정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형이상학적으로 과도하지 않으며, 냉철합니다. 그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p. 181-182)
* 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하나가,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의심의 마음을 열고 더욱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사고와 호기심, 반항, 변화에서 비롯된 생각의 힘입니다. 앎의 모험이 닻을 내릴 수 있는 철학적, 방법론적 초석이나 최종 고정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p. 182-183)
* 저는 철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입니다. 미천한 기계공이죠.* 나가르주나는 양자를 다루는 이 미천한 기계공에게**, 물리적 대상이 그 발현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반드시 묻지 않고서도 물리적 대상의 발현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도 나가르주나의 공空은 깊은 위안을 주는 윤리적 태도를 길러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인 나에게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평온함과 가벼움, 아름다움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p. 183-184)
*/ ** 블로그 註: 동 시대에 태어나 아직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저자, 카를로 로벨리의 겸손과 학문, 詩에 못지않은 문장의 아름다움에도 감동과 경의를 표합니다. 이 각주가 굳이 저자에게 가 닿지 않을지라도, 이만큼의 관계로서 충분히 족합니다.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가 지금 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순간순간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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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로벨리 지음 | 이중원 감수 | 김정훈 옮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2023년 12. 1. 초판 1쇄 | 2023. 12. 15. 6쇄 발행 | (주)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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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로벨리(지은이 1956~, 이탈리아 출생)/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1981년 볼로냐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6년 파도바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이런 물리학 센터 교수이자 프랑스 대학연구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Sette brevi lezioni di Fisica』『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La realta non e come ci appare』『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Et si le temps n'existait pas?』등이 있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첫 출간된 이후 그의 책들은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번역되어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과학책으로 유례없는 기록이다.
* 김정훈 옮긴이/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고전어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죽음: 이토록 가볍고 이토록 먼』 『우리와 그들의 정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외 여러 권의 책을 옮겼다.
* 이중원 감수/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요 연구 분야는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이며, 과학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양자이론, 나노 기술, 로봇 공학. 인공지능 등 어려운 과학이론과 첨단기술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 · 언론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 · 석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핬다. 한국과학철학회 회장과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학』(공저), 『인공지능의 윤리학』(공저), 『인공지능의 존재론』(공저), 『필로테크놀로지를 말한다』(공저), 『포스트휴먼과 융합』(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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