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검지 정숙자 2024. 4. 8. 19:11

 

    암향부동暗香浮動 외 1편

 

     강우식

 

 

  환자들은 의사에게 한번 잡히면

  죽어서야 풀려난다.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내과는 일 년 걸쳐 1번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서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그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5,6년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언 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감격해 아내 이름을 부르며

  비몽사몽으로 울다 깼다.

  저승에서라도 나를 생시처럼

  찾아주는 아내가 있다니

  나는 정말 모처럼 그냥 흐느꼈다.

     -전문(p.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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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강산寂寞江山

 

 

  1.

  눈에는 발이 없다.

  그래서 오는 소리도

  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이 오는 산길을

  혼자 가는 사람은

  바람도 숨 쉬지 않는

  적막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었다가

  동사자凍死者가 된다.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

  꿈을 꾸며 눈 이불을 덮고 잠든

  포근한 죽음이다.

  눈도 고요하고

  산도 강도 적막해졌다.

 

  2.

  더는 세상 살기 싫은

  사내처럼 눈이 내린다.

  산 자만 끊임없이 떠든다.

  죽고 싶은 사람들은

  고요 잠잠할 뿐이다.

  감기에 걸린 듯

  눈가루 같은 약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는다.

  세상은 아비규환인데

  죽어가는 자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적막이 날개를 펴고 깃든다.

     -전문(p.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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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주마간산走馬看山』에서/ 2024. 3. 20. <리토피아> 펴냄 

 * 강우식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행시초』(1974), 『사행시초 2』(2015)『마추픽추』(2014), 『바이칼』(2019), 『백야』(2020)『시학교수』(2021), 『죽마고우』(2022),  『소이부답』(2023) 등, 성균관대학교 시학교수로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