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검지 정숙자 2024. 10. 8. 02:30

<에세이 한 편>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지난 여름, 장마는 길었다. 녹슨 철 대문이 비바람에 저절로 여닫혔다. 그녀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긴 장마에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다.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바람에 서걱대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는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집이 폐가처럼, 유령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잡초를 옆으로 뉘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섰다.

  "엄마,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었다. 여느 날 같으면 문을 열고 "그래, 우리 딸 오나?" 하며 반색할 텐데 조용했다. 매일 화분을 만지고 화단에서 꽃을 키우고 집을 가꾸던 노모는 어디로 갔을까. 폭우에 쓰러진 꽃처럼 몸져누우셨나.

  일주일 전,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피똥을 쌌다. 방안은 꽃동산이 펼쳐져 있었다. 휠체어 바퀴 자국 따라 애기똥풀, 산수유꽃이 피었고, 이불 위에는 선홍빛 다알리아와 글라디올러스가 피어 있었다. 꽃 속에 아버지의 지문이 새겨져 있었다. 휘적휘적 걸레가 지나간 자국, 휠체어 바퀴 자국에서 애기똥풀이 어느새 다알리아로 변하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몸이 점점 아기처럼 변해가는 아버지를 보니 그녀는 애처로웠다. 

  뚝, 뚝, 떨어진 붉고 노란 꽃물은 노모의 피눈물이었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노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자식들한테 너그 아부지 천덕꾸러기 되는데 우짜노? 피똥을 싸면 죽는다는데 너그 아부지가 암만 해도···."

  일주일 전, 자꾸만 되뇌던 노모의 그 말이 그녀의 귓전에 맴돌았다.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니 다행히 잠기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고? 누가 왔다꼬?"

  노모가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일주일 전에 본 딸을 몇 달 만에 만난 듯 반겼다. 노모 옆에는 푹 꺼진 눈, 도드라진 광대뼈의 아버지가 코를 골며 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요단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지 갑자기 두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노모와 아버지를 간병하다가 일주일 전에 오빠에게 쫓겨났었다. 오빠는 자신이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형제가 대신하면 그 꼴도 못 보았다. 그녀는 오빠에 대한 분노와 중병 환자인 부모 걱정으로 마음이 콩죽같이 끓었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현실에 부닥쳤다. 불편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남해 노도櫓島와 보리암에 머물다가 차마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친정집에 잠시 들른 것이다.

  노모는 곁에 누운 그녀에게 이갸기보따리를 주저리주저리 풀었다. 어느 자식이라도 들어와서 같이 살기를 바라지만 그럴 자식이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아버지는 맏아들, 그러니까 그녀의 오빠와 가장 살고 싶어 했지만 오빠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모와 아버지는 태양 같은 맏아들을 기다리며 해바라기하고 있었다.

 

  아참 밥상을 차렸더니, 바닥에 코를 박을 듯한 노모가 밥상을 밀며 안방으로 갔다. 다친 허리를 펼 수 없는 노모와 걷지 못하는 아버지의 식사 시간이다. 노모는 허리가 아파 밥상을 들 수가 없으니 아버지에게 휠체어에 앉아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자 했고, 아버지는 휠체어가 귀찮으니 방에서 먹자고 했다. 항우고집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보다 노모가 더 측은했다. 노모는 거동불편 환자에 심장 질환자라 돌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몸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었다. 환자가 환자를 돌보는 상황이라니, 세상에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실 전축 위, 맏아들의 사족사진이 엎어져 있었다. 자식을 향한 노모의 짝사랑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집 구석구석에 금이 생겼다. 담장에, 안방 벽에" 식탁 유리에, 노모의 심장에 금이 갔다" 금 간 안방 벽에 곰팡이가 시커멓게 슬었다.

  노모는 적막이 무서워서 다니는 주간 요양원에서 얼마 전, 진돗개를 빌려왔다. 노모와 아버지, 진돌이 백구는 승합차로 매일 주간 요양원에 통원했다. 백구는 뒷좌석 짐칸에 탔다.

  "진돌아, 내 아들, 우리캉 살자"

  개밥을 주면서 노모가 말했다. 진돌이가 앞발을 치켜들며 꼬리를 흔들었다. 노모는 그날부터 개와 아들의 족보를 바꾸었다. 살아온 날 만큼이나 가실 날 또한 삶이 버거운 노모.

 

  "천 자리 만 자리 내 침수에 맞는 자리···."*

  하며 어느 날 잠자듯이 가게 해 달라고 빌고 빌었다. 매일 매일 염불처럼 부처님께 빌었다. (2017)

    -전문(p. 12-15)

 

   * 갓바위 어느 노보살의 발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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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에서/ 2024. 6. 27. <지혜> 펴냄

  * 정여운鄭餘芸/ 경북 대구 출생, 2013년『한국수필』로 수필 부문 & 2020년『서정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문에도 멍이 든다, 詩에세이집『다알리아 에스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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