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검지 정숙자 2024. 4. 14. 00:41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한이나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한이나 시인의 시선집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서정시학 , 2024)는 그동안 출간된  일곱 권 시집에서 고른 그의 베스트 컬렉션이자, 한국 서정시의 한 정점을 밝혀온 시인의 오랜 언어를 담아내는 축도縮圖이기도 하다. 한이나 시편을 발표 역순으로 구성한 이 시선집은 자연스럽게 시인이 걸어온 시공간을 아득하게 펼쳐낸 자전적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 시선집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오래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리면서 만들어낸 존재의 그늘을 노래한 미학적 결실이다. 시인의 내면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힘과 "앉아있는 그늘의 집"은 서로 호혜적 역상逆像이 되어준다. 시인은 그늘로 뒤덮인 어둑한 집에 거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햇살로부터 숨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야말로 존재의 그늘이 가장 심원한 삶의 거소居所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내 안의 다른 길"을 비밀의 정원 행간처럼 읽어가는 시인에게는 결국 "어둠을 내쫓는 그"와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

  근원적으로 서정시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회귀적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이나의 서정시는 단순한 나르시시즘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타자의 삶에 충격을 주며 나아가 더 넓은 차원에서 인간을 사유하게 해준다. 시인은 도저한 삶의 '향기'와 '그늘'을 통해 서정시의 심층적 동기를 완성해간다. 삶을 투시하고 그것을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삶을 반성적이고 대안적으로 사유해온 시인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새롭게 경험하고 깨달아가는 '다른 목소리the other voice'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미학적 지평을 확대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과 깨달음을 통한 목소리에 우리는 섬세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의 시는 '향기'와 '그늘'을 통해 궁극의 지경地境에서 울리는 미학적 공명共鳴을 힘껏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p. 시 73/ 론 141 (···) 157-158)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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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에서/ 2024. 3. 29. <서정시학> 펴냄 

 * 한이나/ 충북 청주 출생, 1994년『현대시학』에 작품 발표로 활동 시작, 시집『물빛 식탁』『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유리 자화상』『첩첩단풍 속』『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귀여리 시집』『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