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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이난희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만안교      이난희    글을 읽다 멈추고 그대로 집을 나섭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입니다   관악역을 나와 걷다 보니  정교하게 몸을 붙인 홍예수문으로  안온한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다섯 칸을 계획했던 홍예수문을  일곱 칸으로 개축한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다리 건너편 소나무에  몸을 기댄 바람도 한적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만세萬世에 걸쳐  백성들을 편안便安하게 하는 다리라 이름 지은  200여 년 전 임금의 염원이 장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군주의 애민은 염려를 감당하고  염려는 방도를 생각하였으므로   하천을 건너려고 옷을 걷어 올리지 않..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나무로 만든 시디집을 보다 그 위에 올린  인조 선인장을 봅니다  봄빛이 나무와 꽃들의 잎을 간질이는 계절에  붙박이 되어 한 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고독한 이의 그늘이 따라다니는 환한 아침을  생각합니다  누구는 언어의 집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자유로운 전원의 테마집을 생각하고  집의 상상만큼 길어져 가는 팔이 자판을 두드리고  몰래 한 사랑처럼 전등의 밝기가 어두운 지금  웃으며 달아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고요에 익숙한 풍경은 숨을 내쉬지 않고  들이마십니다  책들을 꺼낸 봉투는 덩그마니 잃어버린 몸을  잠시 기억하다 잠깐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꺼낸 오늘은 투명한 햇살 아래  잡다한 생각을 합니..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뒷짐 진 그녀들이 온다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을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  흩어진 표지들을 봄 햇살에 태워 주먹 쥐고  쪼그리고 앉아, 마이클이 주었던 연적을 손에 쥔다  파란 눈의 사내가 한국도자기를 가방에 넣어  절 단청을 기웃거릴 동안, 달과 6펜스를 부산역  한 모퉁이에서 읽어내며 수양버들은 슬프다는  영어의 표지를 읽어내던 시간, 잠시 춘몽이었다   봄은 나른하고 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표지에 실린 속삭임을 들으며 일어서는 동안  환몽이다  표지들이 뱉어내는 시각, 사랑초 흐드러지다  햇빛에 걸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