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검지 정숙자 2023. 5. 7. 02:24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람 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그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 위로 바람이 부니

  비 오겠습니다

    -전문(p.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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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 역대수상자 작품_에서/ 2021. 10. 1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천양희(2017년 청마문학상 수상)/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마음의 수수밭』『너무 많은 입』『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새벽에 생각하다』등, 산문집『시의 숲을 거닐다』『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작가수업』